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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식민지와 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식민지제국의식, 식민지와 식민지근대(식민지근대화, 식민지근대화론), 식민지지배(식민지배), 식민지와 식민지성, 식민지화, 식민지와 식민지산업화, 식민지제주도개발계획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식민지와 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Ⅱ. 식민지와 식민지제국의식

Ⅲ. 식민지와 식민지근대(식민지근대화, 식민지근대화론)

Ⅳ. 식민지와 식민지지배(식민지배)

Ⅴ. 식민지와 식민지성

Ⅵ. 식민지와 식민지화

Ⅶ. 식민지와 식민지산업화

Ⅷ. 식민지와 식민지제주도개발계획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도로와 항만과 같은 인프라의 발달은 1945년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앞서도록 하였다.
광대한 운송 사회간접시설은 일본인과 한국인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더욱 용이하게 하였다. 대만과 비교한 한국에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투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제적 해석에 더욱 무게를 실어준다. 식민지는 일본 기업가에게 상상도 못했던 설비와, 엄청나게 싼 운송비, 안정된 통화와, 신용, 은행이용을 용이하게 해주고 무엇보다 철도와 같은 물리적구조외에 법 위에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투자 환경을 가능케하는 상업적, 공업적 근간을 제공하였다. 식민지의 인프라의 발달은 세계경제속의 더욱 발달한 나라와 경쟁키 위한 한 부분이었고, 시장이 작은 일본은 인접국가에 집중하고 그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즉 식민지의 공업하는 살벌한 경제 전쟁에서의 하나의 탈출구였던 것이다.
1920년대, 일본이 국외에서의 자유무역과 국내의 자유주의를 추구할 때 한국에서도 식민지인의 이해를 고려해 주는 커다란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보호 무역 주의가 성행하자 일본은 국내에서 권위적으로 한국인에게는 강력한 획일화된 폭압적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세계구조에서의 열등한 위치와 일본의, 식민지를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을 위한 부속품으로 보는 일본 제국주의의 특이한 시각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1945년의 한국의 인프라는 한국 사회와는 연관성이 적었다. 한국인 집단은 노동자나 하급 기술자외에는 모든 근대화 활동에서 제외되어 왔다. 대기업에서 봉급받는 이들의 90%이상은 일본인 이었고 일단 일본에 의해 산업 구조가 왜곡되었기에 남북한이 기존의 구조들을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용하기 위한 적합한 인적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야만 하였다.1935-1945은 한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기였다. 일본은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이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혁명에 수반되는 사회변화는 그 하부에서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즉, 한국인 노동력이 필요하였기에 일본인은 그 대다수를 한국의 남쪽 많은 인구의 곡창지대서 구해왔다. 이 기간에 한국내외에서 많은 인구 이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대규모 인구 이동과 재배치는 한국사회를 심각한 편중과 왜곡에 빠뜨렸다. 이 기간에 한국 농민들은 처음으로 그들의 마을에서 벗어나 일본과 만주, 북한에서 산업사회 혹은 도시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이러한 고향을 떠난 인구의 대다수는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전후 한국의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Ⅷ. 식민지와 식민지제주도개발계획
1937년 제주도개발계획은 총독부의 지시와 공식적인 승인 아래 추진되었다.
당시 미나미 총독은 제주도개발계획이 수립되기 직전인 1936년 겨울 외국인 전문가인 칼레만씨를 초청, 제주도를 자세하게 조사토록 하고 그 후 의견을 들어 1937년 초 5대 정책의 일부분으로 제주도 개발을 지시했다.(잡지 조선 1937년 3월호) 또 총독부는 전쟁에 필요한 화학용 알콜 원료인 고구마를 증산하기 위한 제주도개발공작을 계획(매일신보 1937년 3월 26일자)했고 7월6일에 이르러서는 전라남도와 제주개발주식회사 3자가 협력해 향후 10년간 제주도의 자원을 수탈하는 프로젝트인 제주도개발계획을 확정했다. 이 계획추진을 위해 총독부는 총 사업비 1,131만 여 원을 들여 제주도 개발에 필수적인 도로, 항만, 상수도 시설 등 사회간접자본 설치에 필요한 국비 지원(전체 사업비의 70%)과 주정원료 증산, 축산업, 방풍림, 방사림 설치 등 개발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사업에 대한 보조 지원 역할을 맡았다. 특히 농사시험장을 설치하고 세균검사소, 종양장 등 제주도 개발에 필요한 시설들을 설치하는 한편 농가에 예탁해 추진되는 사업의 원활화를 위해 농경저리자금 대부사업도 벌인다.
제주경제는 사회경제자연적 조건에 있어 육지부의 논농사지역과 다른 점이 많다. 또한 한반도전체에서 제주도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개발정책을 수정 없이 제주도에 적용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제주도의 식민지 개발정책은 처음부터 수정되어 적용시키거나 혹은 개발의 우선 순위에서 후순이었다고 여겨진다. 농업정책을 예를 들어보더라도 식민지 농업정책의 핵심인 산미 증산 계획은 크게 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 사업으로 나누어지는데 토지개량사업은 관개개선, 지목변경, 개간, 간척 등이고 농사개량사업은 시비증가, 품종개량 등이 세부적 실천사항들이 있다. 이 중에서 제주도는 농사개량사업 특히 시비증가나 품종개량 등에 주안점을 두고 실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중 가장 효과적인 정책은 품종개량사업으로 보아진다. 즉 식민지농업정책이 1930년대 제주도농촌의 생산력 변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제주도의 자연환경에 적합한 품종을 도입하여 보급, 확대시켜 생산력 증대에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생육조건이 일치하여 새로 도입된 품종, 작물 그리고 그 작물들이 군수물자확보라는 일제의 필요에 의해서 판로가 보장함으로 해서 제주도농민의 입장에서 생산활동의 안정을 가져오고 그로 인해 생산력 증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제주도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현상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민이 결코 저항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제주도 농민이 생활을 영위하는 주체였고 그 과정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경제적 기회를 취했으며 그것이 식민지 개발을 낳은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박섭, 2004 : 43)
참고문헌
◎ 김수행,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경상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 2011
◎ 김동명, 한국 병합과 식민지 지배, 일본사학회, 2003
◎ 송본무축, 조선의 식민지 근대에 관한 최근의 논의에 대해서 : 일본의 문맥에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9
◎ 이규수, 식민지 체험자의 기억 속의 제국과 식민지, 경남사학회, 2011
◎ 허영란, 일제시기 상업의 근대성과 식민지성, ㅎ나국역사연구회, 1994
◎ 허수열, 개발과 수탈\'론 비판 : 식민지 산업화와 해방 후 산업화의 연관성 비교, 한국역사연구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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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2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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