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답사기 (강화고인돌, 봉천사지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 전등사, 광성보, 강화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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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강화도 답사기 (강화고인돌, 봉천사지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 전등사, 광성보, 강화역사박물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답사 개요
Ⅱ. 강화고인돌 - 선사시대
Ⅲ . 봉천사지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 - 고려시대
IⅥ . 전등사 - 삼국시대
Ⅴ. 광성보 - 조선시대
Ⅵ. 강화역사박물관
Ⅶ. 답사 후기

본문내용

다 다녀와서 아저씨 소리를 들으며 학창생활을 하고 있는데, 학번이 오래되다 보니까 삼별초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가물가물 했다. 분명히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웠던 건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좌별초, 우별초, 별동대라고 했다. 별동대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헷갈렸다. 근데 파릇파릇한 02학번 학우가 말하길 별기군이라고 했다. 그냥 그러려니 했으면 아무 일 없이 잘 넘어갔을 텐데, 처음에 별동대라고 주장했던 사람이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면서 자신이 맞는다고 우겨댔다. 이것은 결국 저녁 밥 내기로 이어졌고, 우리는 이 답을 구하기 위해서 안내원을 찾아가서 물어봤다. 답은 역시 별기군. 우리는 그 일로 인해 한바탕 웃음을 지었고, 그 사람은 그 때부터 내내 풀이 죽어버렸다.
그렇게 전시실을 다 구경하고 나온 우리는 박물관 안쪽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서 망원경을 통해 강화도의 모습을 한 번 들여다보는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입구 쪽에 수많은 비석들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비, 무슨 비 라고해서 꽤나 많았는데, 이것을 의도적으로 왜 이 곳에다가 모아놓은 건지, 또 이 비들은 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다. 안타깝게도 박물관에서는 자료도 없었고, 안내원도 어디론가 사라져서 그 궁금증은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다만 그 곳에 적혀있는 ‘善德碑’라는 한문과 전적지로서의 강화도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이나 백성들을 덕으로 다스렸던 공을 기리기 위한 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강화역사박물관도 뒤로 한 채, 6시 30분경 답사의 마지막을 마치고 강화버스터미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허나 강화도는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 싶었던지, 우리가 기다리던 버스는 우리를 외면한 채 그냥 지나가 버렸다. 20분을 기다리다가 안내소 아저씨에게 물은 후 한참을 걸어서야 다른 버스 정류소에서 일반 버스를 잡아탈 수 있었다. 다들 너무 지친지라 한 학우가 히치하이킹도 몇 번 시도해봤는데,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아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버스에 시달렸는데, 다음에 혹시라도 강화도에 오게 된다면 승용차를 끌고 오면 좋을 듯싶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되었다.
Ⅶ. 답사 후기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신촌 으로 돌아오면서 처음 가졌던 강화도에 대해 토론해 보았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을 지니고 있는 강화도, 마치 방어요새와 같이 설치된 진, 보, 돛대, 그리고 그 안정성에 기인해서 효종 때 설치되었던 사고에 까지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강화도는 한반도의 역사의 중심지이자 격전의 중심지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강화도가 이런 위치를 가지게 되었을까? 단순히 한반도 본토와 떨어진 섬이었기 때문이어서 일까 아니면 그 나름대로의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주제를 두고 토의한 끝에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할 수 있었다. 우선 답사를 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보았던 많은 논들이었다. 때마침 모내기 시기여서 모가 심어져 있는 논과 그렇지 못한 논들이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섬 치고는 논이 많다는 생각만 하였었는데, 토의를 하던 과정에서 ‘이 많은 논의 생산력이라면’하는 내용이 나왔다. 강화도는 이런 많은 생산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시기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는 여전히 생산력이 부족하였으므로 선사시대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며, 이것을 기반으로 거대한 크기의 고인돌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고구려, 신라의 최대의 격전지로 강화도의 교동도가 추정되는 이유와 고려, 조선시대 이 지역에 임시왕실을 설치하고 수개월동안 대몽, 대청 항쟁을 할 수 있었던 주 배경이 바로 이 생산력에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두 번째로 역시 강화도의 지리적 특수성인데 광성보에서 느꼈던 섬이라는 지리적 위치는 한반도 본토에서 떨어져 사방이 뚫린 해안에서의 방어를 의미하였으며, 실제로 보고 느끼기에도 이 것은 최적의 방어조건이 하나라고 생각되었다. 또한 해안방어에 실패하여 후퇴하더라도 전등사의 험준한 산을 이용한 산성은 제 2 방어전선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런 생산력과 방어를 위한 지리적 장점으로 인해 강화도는 전쟁의 격전지로써, 다양한 유적지로써 한반도의 역사의 한 중심지로써 존재해 왔다는 것을 결론으로 우리는 답사의 모든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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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29
  • 저작시기2013.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7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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