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의 실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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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원화성의 실학적 가치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몸 말
1. 답사를 위한 준비 : 화성의 축조 배경
1) 사도세자의 무덤 현륭원 천봉(薦奉)
2) 왕권 강화를 위한 배후 도시
3) 갑자년(甲子年) 구상
4) 농촌 경제의 변화
5) 인구의 이동과 그에 따른 상업의 발달
6) 개방적 상업관으로의 변화
7) 경제적 요충지 수원
8) 조선 후기 실학파의 읍성 강화론
9) 정조대의 서학 열기
2. 수원화성 답사 : 18세기 실학 건축의 정수, 수원화성
1) 수원화성의 축성과 가치
2) 수원화성의 공법과 제작기술
① 수원 화성의 특성
② 과학적이고 철저한 공사 관리
③ 철저한 공사기록 - 화성성역의궤
④ 화성의 과학적·실용적 구조
3) 수원화성의 미학적 요소
① 새롭게 창출된 조형미
② 실학적 미학
4) 정조의 애민정신
Ⅲ. 나가는 말

본문내용

강인함, 세월의 침식에도 굳건하게 자세를 유지해온 끈질김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능적이면서 가장 강한, 실학 정신이 집약된 화성은,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기도 하다.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 돌베개, 2006.
4) 정조의 애민정신
화성 건설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항 중의 하나가 관리와 경영 능력이다. 500칸이 넘는 행궁과 6km에 달하는 성을 축조하면서 34개월(실제 공사기간은 2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성벽을 비롯한 모든 시설물에 책임자를 배치하여 각 공역을 나눔으로써 경쟁심을 유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금전관리를 엄격히 함으로써 일당으로 인건비를 주는 경우와 일의 성과에 의해 돈을 주는 성과급제를 병행함으로써 작업을 독려한 결과이다. 당대의 기술력과 관리/경영능력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태식, 같은 책.
이러한 임금지불방식이나 성과급 제도는 효율적 경영법인 동시에 정조가 가진 애민정신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다. 무보수로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작업하는 이들의 사기를 독려하고 그들의 생계유지를 고려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조는 축성에 참여하는 장인들을 아껴 추위와 더위를 막을 여러 가지 물품을 지원해 줌은 물론, 더위 먹은 사람이나 더위로 몸이 약해진 사람을 치료하는 환약인 척서단(滌暑丹)을 지급하였다. 김동욱, 같은 책.
왕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한 장인들이 성역에 더욱 헌신적으로 임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화성 축조 당시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을 때, 축성의 책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었다. 이 때 정조는 ‘저 백성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사람들인데, 이제 와서 또 다시 이사를 하고 터전을 옮겨야 한다면 이는 백성을 위해 성을 쌓고자 하는 나의 뜻과 다르다.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한다. 이 명 때문에 장안문은 민가를 모두 수용하는 범위에서 지어졌으며 성곽의 총 길이도 늘어나게 되었다 하니, 백성을 깊이 사랑했던 정조답다고 할 만 하다.
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국고의 손실을 가중시키는 것이지만, 정조는 백성의 터전을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적 효율성을 중시하면서도 그보다는 군왕으로서의 도리를 우선시했던 정조의 성리학적 애민정신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화성에는 국왕의 애민정신이 가득 담겨있다. 공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것, 척서단제중단 등의 환약 하사, 설계를 변경해가면서까지 주민들을 성안으로 끌어들인 것 등은 성리학자로서의 덕목을 체화한 정조의 애민정신의 소산이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일이다.
Ⅲ. 나가는 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점은 실학자들이 실리를 중시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도덕성과 인격수양을 추구한 유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를 갈고 닦아 백성들을 올바로 이끈다.”라는 성리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놓지 않았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성리학자들처럼 심성론 위주의 명분과 관념에 치우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을 통해 도덕을 살리는 방안을 썼을 뿐이다. 성리학자인 정조와 실학자인 정약용이 만나 함께 수원화성을 건설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성리학자와 실학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결국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리학과 실학을 무조건 대립적인 구도로 파악한다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원화성을 볼 때, 실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결과물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실사구시’의 정신, 실학적 의미와 가치를 간파해야 한다. 우리가 살펴본 화성의 축조 배경, 벽돌과 돌의 교축,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 생활 속에서 실천 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사구시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즉 정덕(正德)을 추구하지만, 단순히 명분을 위해 생겨난 불필요한 사족(蛇足)은 제거하여, 질박하면서 가장 실생활에 필요하고 유용하도록 제작된 것이 ‘실학정신의 집대성’이라 불리는 수원화성인 것이다.
실학자들은 기존에 만연해있던 사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탐구하고,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을 발휘하여 연구에 매진하는 노력과 실천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실학이란 단어는 사상의 한 유파로서 과거 속에 머물러 있지만,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철학적 태도와 실사구시 정신은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와 우리를 반성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실리(實利)가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명분을 잃은 정치가는 비난받을 뿐이지만 경제를 망친 정치가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게 21세기 한국의 분위기다. 하지만 명분과 도덕은 사회를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도덕과 윤리가 올곧게 서지 않은 집안은 오래가지 않아 주저 않기 마련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수원화성은 당대 실학의 집대성이라는 것 자체로서도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더 나아가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취하는 데 급급한 우리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였던 참된 정신을 일깨워 준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실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옛 정신을 인정하고 현실에서 적용해 나간다면 우리들의 앞에는 더 눈부신 제2의 수원화성, 제3의 수원화성이 축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 참고자료
김동욱,『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 화성』, 돌베개, 2002.
김동욱,『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 -수원성-』, 발언, 1996.
노대환, 『과거의 역사 정조와 서학 수용』.
이태식, 김정현, 이동욱, 『역사적 토목 구조물 수원 화성』, 대한토목학회, 2004.
유봉학,『정조의 화성 건설과 산업진흥책』, 한국실학연구 제2호, 민창문화사, 2000.
최홍규,『정조의 화성 건설』, 일지사, 2001.
김봉렬,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 돌베개, 2006.
화성연구회 홈페이지 (www.hwas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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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02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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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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