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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체로 중국을 매개로 하여 페르시아계 문물이 유입되었다.
첫째로 각종 향료. 아랍인들은 향료의 길이라는 남해로의 개척자이며 향료무역을 중심으로 삼았다. 둘째로 유리기구들인데, 이것들은 질적 우수성 때문에 고급 사치품으로 받아들여졌다. 고신라유리기구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스텝로를 따라 북중국을 거쳐 전입된 것으로 보이고, 통일신라유리군의 공예품들은 위에서 설명한 경로로 유입되었다. 이것들은 소박하고 간소한 형태로 주로 불교 유적지에서 발견된다. 셋째로 슬슬인데, 이것의 실체에 대해선 추측이 논의가 많지만 주옥을 뜻한다. 이슬람화된 석국에서 수입되어 중국을 거쳐 신라로 들어왔을 것이다.
3절 신라에 전래된 서역문물 2
신라로 유입된 서역예술에 관한 것들이다. 첫째로 악기. 통일신라때는 향악이 발전함과 동시에 당악이 등장했는데, 향악은 고구려악과 백제악을 수용, 발전 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나라의 악기들중 일부는 서역악에 원류를 둔다. 당악에 사용된 악기들도 서역으로부터 전해온 것이 많다. 둘째로 잡기인데, 금환,월전,대면,속독 등의 잡기가 대표적이다. 곡예나 연극같은 것을 이용되던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공예기법인데, 서역제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장식적 문양이다. 이는 서역적,중국적,불교적 요소가 전래된데서 뚜렷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연화문양이 있다. 또다른 서역적 문양으론 대칭문양이 있다.(페르시아계)
그리고 가장 뚜렷하게 서역적 요소로 간주되는 장신구 세공기법인 누금기법이다.
<연화 문양>
<======나의 생각======>
이제껏 중국 중심의 동서교역을 보다가 신라의 동서교역 흔적을 보았다.
중국도 그러했듯 주로 유럽의 흔적보단 페르시아와 아랍의 흔적이 주로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유럽은 워낙 암흑기여서 그랬던거라고 추측해본다. 아마 로마가 한참 부흥할 때 이렇게 동서교역이 이뤄졌다면 로마의 흔적도 아주 많이 남아있을 듯 하다. 불교국가 신라 답게, 불교 물품에서 나타나는 서역교역의 흔적을 더 비중을 두고 봐야 당대 문화적 맥동을 넓고 깊게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신라의 아랍인>
14장 신라와 서역간의 인물교류
1절 아랍 무슬림들의 신라내왕
최근까지 학계에서는 헌종에게 파견한 루브루크가 한국을 처음 언급, 일본에서 포교하던 세스페데스 선교사가 임진왜란때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고, 제주도에 표착한 오우벨켈크호가 한국해역에 출현한 최초의 이양선이라고 고증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서서 신라라는 나라의 국명을 밝히고, 많은 아랍인과 무슬림이 내왕하고 정착했다는 기술은 아랍문헌에서 발견되어진다. 아직은 연구의 미흡으로 제대로 밝혀지진 않고 있으나 어찌됐든 9세기 중엽의 아랍,무슬림들이 한국을 세계 만방에 소개했던 것이다.
아랍측 문헌적 기록을 보면, 중세 아랍지리학자인 이븐 쿠르다지바의 저서에서 무슬림들의 신라내왕과 정착이 분명하게 나와있다. 또한 이슬람제국의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도 당시 신라에로의 내왕과 정착을 지명하고, 이라크인과 그밖의 외국인들의 정착을 기술하였다. 앗 디마시끼 또한 정치대립으로 무슬림들이 신라까지 건너왔다고 기록한 바 있다.
2절 혜초
동서문화교류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혜초의 생애는 미궁속에 있다가, 1908년 펠리오가 돈황천불동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함으로서 그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돈황은 많은 구법승들과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많은 탐험가들이 동서탐험을 위해 통과한 곳이다. 신라출신 고승 혜초의 서역행은 국가간의 관계사 이외에도 동서교류사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당시의 세계는 서쪽의 이슬람과 당나라의 2국 대립구조로, 그둘의 교류는 곧 세계적 범위의 동서문화 교류이기 때문이다. 혜초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아라비아에 다녀왔고, 한 문화권에선 처음으로 현지견문록을 남겨 이슬람세계와의 관계사에서 개척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혜초는 8세기 무렵의 인도,중앙아시아,페르시아,아라비아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남겨놓아 귀중한 세계사 연구의 자료를 남겼으며, 높은 문학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둔황의 석굴을 조사하는 펠리오>
3절 사마르칸드 사행
1965년 사마르칸드의 아프라시압 궁전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각국 사절단이 입조하는걸 묘사한 벽화였는데, 그중 한쪽에 조우관과 황색상의, 바지를 입고 환두 대도를 패용하고있는 2인상이 있는데, 학자들 대부분이 이를 한국의 사절이라는데 견해를 일치한다. 인종적인 외형이나, 의상등이 당시 한국인의 의상과 심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들고있는 환두 대도가 한반도 삼국시대 벽화에서 등장하는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나라 사신인지는 아직 상이성을 보이고 있다. 문헌상으로도 수,당에 맞선 돌궐과 제휴한 고구려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를 보아도 고구려의 공식적 대서역 관계는 일찍부터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사신 파견 연대 문제이다. 이는 추측컨대, 연개소문이 당에 대한 강경태도를 취했기때문에 서역제국과 제휴하여 사마르칸드지방에 사신을 파견할 가능성을 추정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는 대략 666년 정도로 추산했을 때, 학자들이 제시한 7세기 후반과 일치하게 된다. 고로 7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와 서역간에 사신파견과 같은 공식적 관계가 이루어 졌음을 알게된다.
<======나의 생각======>
13장에선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중국-실크로드를 통한 문물 교역을 보았다면, 14장은 혜초와 사마르칸트 벽화의 예로, 고대 동서교류의 실질적 인물로서의 흔적을 보았다. 혜초는 페르시아까지 도달했다하고,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쪽~아랍 부근의 교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유물이 더 발견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렇게 추측해보건대.. 삼국시대 후반부터 이미 저 멀리 서역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때 벽란도를 통해 아랍인들과 교류하던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렇게 그 이전, 심지어 삼국시대때부터 이러한 서역과의 교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마 잘 모를 것이다. 지리상으로 중국으로 가로막혀있지만, 삼국시대때부터 이방의 세계였던 저 먼 서역과 교류했다는 흔적이 남아있다는게 참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타클라마칸 사막>
첫째로 각종 향료. 아랍인들은 향료의 길이라는 남해로의 개척자이며 향료무역을 중심으로 삼았다. 둘째로 유리기구들인데, 이것들은 질적 우수성 때문에 고급 사치품으로 받아들여졌다. 고신라유리기구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스텝로를 따라 북중국을 거쳐 전입된 것으로 보이고, 통일신라유리군의 공예품들은 위에서 설명한 경로로 유입되었다. 이것들은 소박하고 간소한 형태로 주로 불교 유적지에서 발견된다. 셋째로 슬슬인데, 이것의 실체에 대해선 추측이 논의가 많지만 주옥을 뜻한다. 이슬람화된 석국에서 수입되어 중국을 거쳐 신라로 들어왔을 것이다.
3절 신라에 전래된 서역문물 2
신라로 유입된 서역예술에 관한 것들이다. 첫째로 악기. 통일신라때는 향악이 발전함과 동시에 당악이 등장했는데, 향악은 고구려악과 백제악을 수용, 발전 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나라의 악기들중 일부는 서역악에 원류를 둔다. 당악에 사용된 악기들도 서역으로부터 전해온 것이 많다. 둘째로 잡기인데, 금환,월전,대면,속독 등의 잡기가 대표적이다. 곡예나 연극같은 것을 이용되던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공예기법인데, 서역제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장식적 문양이다. 이는 서역적,중국적,불교적 요소가 전래된데서 뚜렷이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연화문양이 있다. 또다른 서역적 문양으론 대칭문양이 있다.(페르시아계)
그리고 가장 뚜렷하게 서역적 요소로 간주되는 장신구 세공기법인 누금기법이다.
<연화 문양>
<======나의 생각======>
이제껏 중국 중심의 동서교역을 보다가 신라의 동서교역 흔적을 보았다.
중국도 그러했듯 주로 유럽의 흔적보단 페르시아와 아랍의 흔적이 주로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유럽은 워낙 암흑기여서 그랬던거라고 추측해본다. 아마 로마가 한참 부흥할 때 이렇게 동서교역이 이뤄졌다면 로마의 흔적도 아주 많이 남아있을 듯 하다. 불교국가 신라 답게, 불교 물품에서 나타나는 서역교역의 흔적을 더 비중을 두고 봐야 당대 문화적 맥동을 넓고 깊게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신라의 아랍인>
14장 신라와 서역간의 인물교류
1절 아랍 무슬림들의 신라내왕
최근까지 학계에서는 헌종에게 파견한 루브루크가 한국을 처음 언급, 일본에서 포교하던 세스페데스 선교사가 임진왜란때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고, 제주도에 표착한 오우벨켈크호가 한국해역에 출현한 최초의 이양선이라고 고증한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서서 신라라는 나라의 국명을 밝히고, 많은 아랍인과 무슬림이 내왕하고 정착했다는 기술은 아랍문헌에서 발견되어진다. 아직은 연구의 미흡으로 제대로 밝혀지진 않고 있으나 어찌됐든 9세기 중엽의 아랍,무슬림들이 한국을 세계 만방에 소개했던 것이다.
아랍측 문헌적 기록을 보면, 중세 아랍지리학자인 이븐 쿠르다지바의 저서에서 무슬림들의 신라내왕과 정착이 분명하게 나와있다. 또한 이슬람제국의 지리학자인 알 마스오디도 당시 신라에로의 내왕과 정착을 지명하고, 이라크인과 그밖의 외국인들의 정착을 기술하였다. 앗 디마시끼 또한 정치대립으로 무슬림들이 신라까지 건너왔다고 기록한 바 있다.
2절 혜초
동서문화교류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혜초의 생애는 미궁속에 있다가, 1908년 펠리오가 돈황천불동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함으로서 그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돈황은 많은 구법승들과 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많은 탐험가들이 동서탐험을 위해 통과한 곳이다. 신라출신 고승 혜초의 서역행은 국가간의 관계사 이외에도 동서교류사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당시의 세계는 서쪽의 이슬람과 당나라의 2국 대립구조로, 그둘의 교류는 곧 세계적 범위의 동서문화 교류이기 때문이다. 혜초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아라비아에 다녀왔고, 한 문화권에선 처음으로 현지견문록을 남겨 이슬람세계와의 관계사에서 개척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혜초는 8세기 무렵의 인도,중앙아시아,페르시아,아라비아에 대한 정확한 기술을 남겨놓아 귀중한 세계사 연구의 자료를 남겼으며, 높은 문학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둔황의 석굴을 조사하는 펠리오>
3절 사마르칸드 사행
1965년 사마르칸드의 아프라시압 궁전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각국 사절단이 입조하는걸 묘사한 벽화였는데, 그중 한쪽에 조우관과 황색상의, 바지를 입고 환두 대도를 패용하고있는 2인상이 있는데, 학자들 대부분이 이를 한국의 사절이라는데 견해를 일치한다. 인종적인 외형이나, 의상등이 당시 한국인의 의상과 심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들고있는 환두 대도가 한반도 삼국시대 벽화에서 등장하는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나라 사신인지는 아직 상이성을 보이고 있다. 문헌상으로도 수,당에 맞선 돌궐과 제휴한 고구려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를 보아도 고구려의 공식적 대서역 관계는 일찍부터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사신 파견 연대 문제이다. 이는 추측컨대, 연개소문이 당에 대한 강경태도를 취했기때문에 서역제국과 제휴하여 사마르칸드지방에 사신을 파견할 가능성을 추정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는 대략 666년 정도로 추산했을 때, 학자들이 제시한 7세기 후반과 일치하게 된다. 고로 7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와 서역간에 사신파견과 같은 공식적 관계가 이루어 졌음을 알게된다.
<======나의 생각======>
13장에선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중국-실크로드를 통한 문물 교역을 보았다면, 14장은 혜초와 사마르칸트 벽화의 예로, 고대 동서교류의 실질적 인물로서의 흔적을 보았다. 혜초는 페르시아까지 도달했다하고,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쪽~아랍 부근의 교류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유물이 더 발견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렇게 추측해보건대.. 삼국시대 후반부터 이미 저 멀리 서역과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때 벽란도를 통해 아랍인들과 교류하던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렇게 그 이전, 심지어 삼국시대때부터 이러한 서역과의 교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마 잘 모를 것이다. 지리상으로 중국으로 가로막혀있지만, 삼국시대때부터 이방의 세계였던 저 먼 서역과 교류했다는 흔적이 남아있다는게 참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타클라마칸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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