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역사 장건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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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웅의 역사 장건편을 읽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 1 부 은하수 끝을 보고 온 사나이
1. 성도에 있는 지기석
2. 진 시황제와 만리장성
3. 북방의 패자 흉노
4. 흉노에 대한 두려움

제 2 부 포로생활
1. 한 무제, 영단을 내리다
2. 장건, 월지로 여행을 떠나다
3. 초원에서의 포로 생활 10년
4. 탈출

제 3 부 불사신 `박망후`의 대활약
1. 13년 만의 귀국보고
2. 숙적 흉노를 막북으로 쫓다
3. 오손과의 동맹을 구하다
4. 제4의 서남 실크로드

제 4 부 서역에 꽃피운 장건의 꿈
1. 이역으로부터의 최신 정보
2. 한혈마를 손에 넣다
3. 장안을 가득 채운 이국의 풍미
4. 장건 사망 후의 꽃과 열매

본문내용

전에서 본 것들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이 특히 좋아한 옥의 대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기련산과 곤륜산에서 산출된다. 서방의 보석도, 동방의 비단도 모두 무게가 가벼운 반면 고가여서, 무역에는 매우 적합한 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우면서 깨지기 쉬운 것도 좋아했다. 바로 유리제품이다. 일본을 실크로드의 종점이라고들 한다. 나라 시대의 정창원에 있는 것 중에 당나라 물건과 함께 인도의 약품과 페르시아의 유리 제품이 있다.
이 밖에 음악이나 미술 등의 무형 예술도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왔다. 무제는 궁중에 음악청이라고 할 수 있는 '악부'를 설치해서 자신의 예술 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했다. 비파나 공후 등이 서역에서 도래한 것도 이 시대이다.
4. 장건 사망 후의 꽃과 열매
"장건이 귀국하자, 황제는 그를 대행으로 임명해 구경의 대열에 올렸다.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나서 장건은 죽었다."라고만 『사기』는 적고 있다. 장건이 두 번째의 오손 사절에서 돌아온 것은 출발한 해인 기원전 115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해인 기원전 114년, 장건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출생 연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역시 알 수 없다.
장건의 경우, 무제의 공모에 응해서 서역의 대월지로 여행을 떠난 것이 기원전 139년의 일이다.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는 것은 역시 30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연도는 다분히 50대 후반이거나 60대가 된다. 첫 번째 출발인 기원전 139년부터 병사하는 기원전 114년까지의 26년간, 그 중에 17년 간은 이역에 있었다. 흉노의 땅에서 포로가 된 10년 이외에는 사막의 서역이나 파미르의 준령에 있었다.
그는 한나라의 사자로서 평화적인 교섭을 원칙으로, 목숨을 걸고 대월지와 오손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시대보다 일찍 그가 인생을 달렸기 때문이다. 그 예가 몇 가지 있다.
장건 사후 8년째, 오손으로부터 무제에게 1천 마리의 명마가 보내지다.
장건 사후 12년째, 대원에서 이장군이 한혈마를 끌고 오다.
장건이 뿌린 씨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이처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본직적인 효과라는 것은 항상 후에 나타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장건 효과가 있었다. 서역의 사자가 되는 것이 유행한 것이다. 하급관리들이 앞을 다투어 무제에게 상소해서 서역 제국과 교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그 사자가 되겠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장건의 사후 수년 간은 서역으로 사절이 가끔 파견되었다. 1년 동안 많으면 열 번 이상, 적어도 서너 번은 있었다. 1회의 사절단의 구성은 1백 명에서 수백 명이었다고 하므로 대규모였다.
장건 사후 34년째, 서역의 누란에서는 둔전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곳을 경유해서 물과 식량을 보급하고, 안내자를 찾아야 했다. 무제가 파견한 정예의 기병 7백 명이 순식간에 누란을 공격해서 함락시킨 것은 기원전 108년의 일이었다. 이는 무제가 서역국에 무력을 행사한 최초의 일이었다.
장건 사후 53년째, 서역 경영을 위한 관청인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이미 각지에 둔전병이 있었지만, 한나라와 서역 제국과의 관계는 역시 일진일퇴였다. 흉노는 변함없이 기회만 있으면 침범해왔고, 서역도호부라는 관청도 폐지와 설치를 반복했다.
한나라와 로마는 천천히 가까워졌다.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의 사절이 온 것은 166년, 후한의 환제 치하였다. 그것은 장건 사망 후, 2백73년째의 일이었다. '동쪽은 장안에서 서쪽은 로마까지'로 표현된 실크로드가 명실상부하게 개통되는 데는 이 정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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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8페이지
  • 등록일2003.11.20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3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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