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천황의 탄생
1)고대의 천황
2)중세 근세의 천황
3)근대의 천황
4)현대의 천황
2. 천황을 둘러싼 논란
1)전쟁책임
2)침해당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
3)천황의 정치적 이용
3. 천황제의 존속 이유
4. 일본속의 천황
1)천황에 충성한 사람들
2)천황에 반역한 사람들
1)고대의 천황
2)중세 근세의 천황
3)근대의 천황
4)현대의 천황
2. 천황을 둘러싼 논란
1)전쟁책임
2)침해당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
3)천황의 정치적 이용
3. 천황제의 존속 이유
4. 일본속의 천황
1)천황에 충성한 사람들
2)천황에 반역한 사람들
본문내용
차 막부의 간섭을 받게 된다. 이 때부터 천황, 조정에서 무사로 정권의 중심이 이동하였고,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도 미나모토 가문이 3대로 단절되고 호조(北條) 씨가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13세기 초, 원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막부는 서일본의 무사들까지 동원하여 그를 막아내지만 보상이 미흡하여 무사들의 불만이 강해졌다. 그러나 반면에 서일본 지역까지 지배권을 확대하여 점점 천황의 힘은 약해져 갔다. 지토와 슈고를 두어 기존 조정과는 다른 토지 지배 체제를 확보하였다.
14세기가 되자, 조정은 천황 계승 문제도 혼자 해결하지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로 인해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게 되는데, 결국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한다. 이 때 생긴 분쟁으로 인해 무사들은 가마쿠라 막부에 반감을 가지게 되고,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이용해 다시금 천황 친정의 시대를 열고자 유력 무사인 아시카가 씨를 이용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다. 호조 씨는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建武)의 신정’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여 과거의 천황 지배 체제를 재건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막부 타도에 그다지 큰 공을 세우지 않은 구게 들을 중시하고 무사들은 배제하여 반발이 심해져, 무사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천황을 옹립한다. 이로써 겐무의 신정은 3년 만에 종료되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쇼군에 오르고, 고다이고 천황은 나라의 요시노에 남조를 세워 북조에 대항한다.
그러나 60년 만에 3대 쇼군인 요시미츠가 남조를 통일하고 교토 무로마치에 막부를 세움으로써 남북조 시대가 종료되고, 무로마치 막부가 열린다. 이 때부터 막부가 일본 전역을 지배하게 되고, 천황과 조정은 실권을 잃게 된다. 이후 천황과 구게는 예법을 행하는 존재로, 쇼군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 외에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무로마치 시대는 일본 역사상 제일 혼란스러웠던 시기로, 전국 시대도 이 당시에 포함된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천황처럼 실권을 잃고, 유력 무사 가문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결국 지역마다 영주인 다이묘들이 분립하여 난립함으로 인해 막부는 이름만 남게 된다. 천황의 권위는 완전히 사라지고, 단순히 무사들의 지위를 인정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막부 권력의 중추부를 구성하는 무장들이 천황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황의 권위를 막부 권력의 안정, 강화와 확실하게 결부된 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것은 말 그대로 막부와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 천황과 조정을 존경해서였음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전국 시대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거의 종결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완전히 일본 열도가 통일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 무리한 원정과 내부 분열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의 에도에 막부를 열고,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킴으로써 에도 시대가 열린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근세라고 보는데, 천황제에 있어서는 암흑기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에도 막부는 이전의 혼란기를 겪고 출범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안정을 제일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도쿠가와 씨 중심의 막부 중심 체제를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그에 따라 지방 다이묘들은 물론이고 천황가와 귀족들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명분상으로 군주였던 천황 및 귀족들의 경제력은 다 합쳐도 불과 10여만석의 중간급 다이묘 정도에 불과할 정도였다. 또한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실권은 관위의 서임권과 연호 및 역법 제정권만이 있을 따름이었는데,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관위의 서임권조차 무가(武家)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이묘 이하의 무가 관위는 쇼군이 서임하고 조정은 그를 인증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막부는 황위 계승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직 취임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뜻을 따르게 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실권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1615년 지정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에서는 막부가 아예 법령으로 천황과 귀족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데 이른다.
또한 고대 이래 이어져 온 천황과 사원 간의 밀접한 관계도 막부가 잘라 버림으로써, 천황이 사원을 통한 민중에 대한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길도 막혀 버리게 된다. 물론 실질적인 권한에 있어서는 탄압을 개시했지만, 막부는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는 데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천황가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막부 권력을 세우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도 세워야 한다는 모순점을 내포하여, 후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 속에서, 유학자들과 국학자들 사이에서도 천황의 위치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다. 특히 대권 위임론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정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막부에 의해 즉시 탄압되어 빛을 보지 못했다. 또한 양위론 역시 현실성이 없고, 천황가를 찬탈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채택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위임론의 가장 큰 약점은, 근본적으로 권력은 천황에게 있으나 잠시 천하를 위해 넘겨주었을 뿐,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메이지 신정부에 대정 봉환을 하게 하는 이론적 바탕이 된다.
또한 민중에 있어서는 천황은 단순한 지방 영주보다 조금 다른 어떤 무엇 정도로 여겨졌으며, 그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막부 후기에 들면 이세 신궁 참배 열풍이 불고, 막부 정치에 불만을 품은 이들에 의해 다시금 그 존재가 부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의 페리가 이끄는 흑선이 나타나 개항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막부의 무능을 깨달은 사쓰마, 조슈, 도사 등 웅번의 신진 무사 세력에 의해 막부가 타도되고,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에도 시대는 막을 내린다.
3)근대의 천황
메이지 유신에 의해 에도막부가 타도되고, 근대적인 국가체제가 성립되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신진무사 계층은 에도막부 타도의 명분으로 천황의 왕정복고를 내세웠다. 1868년 메이지 신정부를 건립한 메이지 천황은 교토에서 도쿄로 거처를
14세기가 되자, 조정은 천황 계승 문제도 혼자 해결하지 못할 만큼 약해졌다. 그로 인해 가마쿠라 막부가 개입하게 되는데, 결국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한다. 이 때 생긴 분쟁으로 인해 무사들은 가마쿠라 막부에 반감을 가지게 되고,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이용해 다시금 천황 친정의 시대를 열고자 유력 무사인 아시카가 씨를 이용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다. 호조 씨는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建武)의 신정’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여 과거의 천황 지배 체제를 재건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막부 타도에 그다지 큰 공을 세우지 않은 구게 들을 중시하고 무사들은 배제하여 반발이 심해져, 무사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천황을 옹립한다. 이로써 겐무의 신정은 3년 만에 종료되고, 일본 역사상 최초로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쇼군에 오르고, 고다이고 천황은 나라의 요시노에 남조를 세워 북조에 대항한다.
그러나 60년 만에 3대 쇼군인 요시미츠가 남조를 통일하고 교토 무로마치에 막부를 세움으로써 남북조 시대가 종료되고, 무로마치 막부가 열린다. 이 때부터 막부가 일본 전역을 지배하게 되고, 천황과 조정은 실권을 잃게 된다. 이후 천황과 구게는 예법을 행하는 존재로, 쇼군의 지위를 인정하는 것 외에 실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무로마치 시대는 일본 역사상 제일 혼란스러웠던 시기로, 전국 시대도 이 당시에 포함된다.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천황처럼 실권을 잃고, 유력 무사 가문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결국 지역마다 영주인 다이묘들이 분립하여 난립함으로 인해 막부는 이름만 남게 된다. 천황의 권위는 완전히 사라지고, 단순히 무사들의 지위를 인정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막부 권력의 중추부를 구성하는 무장들이 천황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황의 권위를 막부 권력의 안정, 강화와 확실하게 결부된 것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것은 말 그대로 막부와 자신들을 위한 것으로, 천황과 조정을 존경해서였음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전국 시대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거의 종결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완전히 일본 열도가 통일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 무리한 원정과 내부 분열로 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의 에도에 막부를 열고,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킴으로써 에도 시대가 열린다. 이 시기를 일본에서는 근세라고 보는데, 천황제에 있어서는 암흑기라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에도 막부는 이전의 혼란기를 겪고 출범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안정을 제일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도쿠가와 씨 중심의 막부 중심 체제를 확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그에 따라 지방 다이묘들은 물론이고 천황가와 귀족들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명분상으로 군주였던 천황 및 귀족들의 경제력은 다 합쳐도 불과 10여만석의 중간급 다이묘 정도에 불과할 정도였다. 또한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실권은 관위의 서임권과 연호 및 역법 제정권만이 있을 따름이었는데,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관위의 서임권조차 무가(武家)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이묘 이하의 무가 관위는 쇼군이 서임하고 조정은 그를 인증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막부는 황위 계승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직 취임에 있어서도 자신들의 뜻을 따르게 했기 때문에 결국 모든 실권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1615년 지정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竝公家諸法度)’에서는 막부가 아예 법령으로 천황과 귀족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데 이른다.
또한 고대 이래 이어져 온 천황과 사원 간의 밀접한 관계도 막부가 잘라 버림으로써, 천황이 사원을 통한 민중에 대한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길도 막혀 버리게 된다. 물론 실질적인 권한에 있어서는 탄압을 개시했지만, 막부는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는 데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천황가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막부 권력을 세우기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도 세워야 한다는 모순점을 내포하여, 후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 속에서, 유학자들과 국학자들 사이에서도 천황의 위치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다. 특히 대권 위임론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정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막부에 의해 즉시 탄압되어 빛을 보지 못했다. 또한 양위론 역시 현실성이 없고, 천황가를 찬탈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채택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위임론의 가장 큰 약점은, 근본적으로 권력은 천황에게 있으나 잠시 천하를 위해 넘겨주었을 뿐,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메이지 신정부에 대정 봉환을 하게 하는 이론적 바탕이 된다.
또한 민중에 있어서는 천황은 단순한 지방 영주보다 조금 다른 어떤 무엇 정도로 여겨졌으며, 그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막부 후기에 들면 이세 신궁 참배 열풍이 불고, 막부 정치에 불만을 품은 이들에 의해 다시금 그 존재가 부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의 페리가 이끄는 흑선이 나타나 개항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막부의 무능을 깨달은 사쓰마, 조슈, 도사 등 웅번의 신진 무사 세력에 의해 막부가 타도되고,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에도 시대는 막을 내린다.
3)근대의 천황
메이지 유신에 의해 에도막부가 타도되고, 근대적인 국가체제가 성립되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신진무사 계층은 에도막부 타도의 명분으로 천황의 왕정복고를 내세웠다. 1868년 메이지 신정부를 건립한 메이지 천황은 교토에서 도쿄로 거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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