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 두 국가의 엇갈린 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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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페르시아 전쟁, 두 국가의 엇갈린 희비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페르시아 전쟁의 정의


Ⅱ. 본론
▸당시 시대상 및 환경 (B.C. 540년 경)

▸전쟁 발발 배경
- 이오니아 반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마라톤 전투 (B.C. 490)
- 그 후 10년간의 정세 (전후 복구 및 침략 준비)
- 테르모필레 전투 (B.C. 480)
- 살라미스 해전 (B.C. 480)
- 플라타이아이 전투 (B.C. 479)
- 종전(B.C. 448)

Ⅲ.결론
▸전쟁의 영향 및 결론
-페르시아에의 영향
-그리스에의 영향
-결론

본문내용

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그리스 연합군은 40 척을 잃은 반면, 페르시아 군은 200척을 잃었고 모두 바다에 가라앉았다. 크세르크세스의 휘하 장수들은 그리스에서 퇴각하자고 왕께 건의를 하였고 그는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크세르크세스는 남은 페르시아 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전투는 불과 하루 만에 끝났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페르시아의 수사라는 도시까지 달아났고, 페르시아 함대는 에게 해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아테네가 이 해전에서 승리를 이끔으로서 아테네의 황금기가 시작 되었다. 현대 그리스 해군은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매년 9월 12일에 기념식을 연다.
-플라타이아이 전투 (B.C. 479)
살라미스 해전후, 이듬해인 기원전 479년 봄, 마드로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레산드로스 1세를 보내어 그리스와 협정을 맺으려 하였으나 그리스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페르시아는 다시 전투를 준비했다. 아테나는 이번에도 시가지를 비우고 해상에서 승부를 거는 작전을 세웠고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왕이 지휘하는 5만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테바이 근처의 플라타이아이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혼전이었지만 스파르타와 테게아군의 용맹으로 대세는 그리스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마드로니우스는 전사하고 페르시아군은 퇴각했다. 페르시아군은 퇴각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의 매복에 걸려 대부분이 소아시아로 건너가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바다쪽에서 해군도 플라타이아이 전투가 벌어진 날 페르시아의 해군을 섬멸했다.
-종전(B.C. 448)
같은해 그리스는 반격에 나섰는데 아테나의 해군을 주축으로한 그리스 연합함대는 에게해를 지나 소아시아로 침공했고 그리스계 도시국가를 해방시켰다. 이후 30년간 크고 작은 페르시아와 그리스사이에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아테네의 주도로 새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은 아나톨리아 해안에 있는 이오니아계 도시국가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계속 공세를 펼쳤는데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 기원전 448년경에는 마침내 아테네와 그 동맹국 및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Ⅲ.결론
전쟁의 영향 및 결론
-페르시아에의 영향
페르시아는 영토 확장과 경제적 이유 또는 종교적인 이유로 서방으로의 군사적 진출을 했다. 그리스를 정복할 야욕으로 전쟁을 일으킨 결과는 페르시아의 참패였다. 페르시아는 그리스-페르시아 간 전쟁에 많은 물자와 인력을 쏟아부었고, 그 전쟁이 결국 패배로 돌아가면서 소모된 인력과 물자를 감당해낼 수 없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이전까지 패배를 모르던 페르시아의 대군의 위세도 폭락해 지배받던 주변의 여러 국가들도 페르시아를 향해 반기를 들어 그에 대해 진압이 쉽지 않게 된 페르시아였다.
-그리스에의 영향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폴리스)들이 정립된 후 발발하여 각 국가간의 반목이 심하던 때였다. 각 도시국가 사이에는 교류가 활발한 국가도 있던 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국가도 존재했고, 오히려 이런 반목을 줄여보고자 올림픽이라는 대회를 열어야만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국가 전체 존립의 위기를 겪으면서 그들은 일시적이나마 ‘동맹’을 맺었으며 힘을 합쳐 페르시아 군을 상대했다. 스파르타의 막강한 육군과 아테네의 해군 등 각 국가는 열심히 싸워냈고 그리스를 동방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냈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터키 서쪽 연안)지방의 도시국가들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런 그리스의 연합은 후에도 동맹을 이루어 통일 그리스를 꿈꾸는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델로스 동맹의 맹주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델로스 동맹을 유지하는 델로스 공납금이라는 세금을 동맹을 이루는 국가들로부터 거두어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자금으로 인해 페르시아 전쟁에서 큰 무훈을 세운 평민이나 노동자 계급에게 막대한 보상이 따르게 된다. 더불어 민생이 안정되자 민주주의는 더욱 발전해 완벽한 민주주의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가고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후에는 이 델로스 공납금이 거의 강제로 취하는 것처럼 변모해 버리자 다른 도시국가들은 이에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이것을 스파르타가 맹주로 있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서는 아주 탐탁치않게 생각하였으며 이로 인해 반목을 거듭하던 두 동맹은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그리스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결론
페르시아 전쟁은 어른과 어린아이의 싸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국력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영토에서부터 군사의 수, 물적 자원의 차이는 절대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충분히 챙길 줄 아는 민족이었다. 비록 몇 개의 폴리스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나중에는 배신자로서 처벌을 받게 되지만 대다수의 폴리스들은 페르시아 전쟁의 참여하여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과 영토와 주권 등을 지킬 수 있었다. 즉, 마지막으로 갈수록 그리스 대 페르시아의 양상이 뚜렷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동방과 서방의 충돌이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였다. 그래서 일부 폴리스들은 자신들의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이 페르시아의 승리로 끝났을 때를 감안하여 페르시아에 항복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단순히 자국의 사상과 이념과 영토와 주권 등을 지키려고 하였다면 이들은 페르시아에 쉽게 항복의 표시를 전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페르시아 전쟁과정에서 두 문화 사이의 충돌은 분명히 존재하였으나 단순히 이 전쟁을 통틀어 동방과 서방의 충돌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 페르시아 전쟁은 동방과 서방의 충돌이라기보다는 정치학에서 얘기하는 ‘제국이 자국 내에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이 어쩌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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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5.06
  • 저작시기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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