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이야기 서평)_우수자료 중국인 이야기1 요약 및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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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서평)_우수자료 중국인 이야기1 요약 및 서평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김명호 교수의 진짜 중국인 이야기
2. 서평: 한국에서 중국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3. [중국인 이야기 1] 내용 발췌 요약
1) 류는 마오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
2) 장하오
3) 천하명장 린뱌오
4) 숨겨진 모략가 캉성
5) 참 교육자 메이타이치
6) 두부와 혁명
7) 사상가 장선푸
8) 곧은 언론인 추안핑
9) 장제스의 쟁우 후스
10) 풍운아 장징궈
11) 자유주의자 레이전
12) 선비 천부레이
13) 장제스의 천제루
14) 마오의 장정부인 허쯔전
15) 여걸 세쉐홍
16) 음악천재 네얼
17) 중국현대미술의 반역자 쉬베이홍
18) 예첸위
19) 짜고 친 포격전-진먼다오
20) 미,중 외교
21) 패전부대 마약왕
22) 댄스 금지령
23) 청방 두웨성
24) 건설왕.장진장
25) 강산을 사랑했지만 미인을 더 사랑한 차이어
26) 마지막 황제 푸이

본문내용

이었다. 마오쩌둥도 여려 번 만났지만 그의 행, 불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장징장이었지만 최후 승자를 보는 눈은 없었다.(pp481 490)
25) 강산을 사랑했지만 미인을 더 사랑한 사람-차이어
< 차이어가 좀더 오래 살았더라면 중국은 더 시끄러웠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중국의 전통 도덕으로 무장된 현대적인 군인의 표본이었다. > 제1권 p495
실패하면 죽음이 있을 뿐 망명은 하지 않겠다. -차이어
차이어(蔡鍔)는 16세 때 2원을 들고 고향을 떠났다. 위안스카이(遠世凱)에게 1000원을 빌려 일본 유학을 떠났다. 어떻게 이 만남이 이루어 졌는지는 추측조차 불가능하다. …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6년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신군을 훈련시켰다. 1911년 7월 윈난(雲南) 총독의 초청으로 서남지역에 첫발을 디딘 후 신군 훈련을 일임 받다가 신해혁명이 폭발하자 독립을 선언한 윈난의 관병들은 차이어를 군정부 도독(都督)에 추대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쑨원은 공화제를 지지한 위안스카이 안을 수용해 임시 대총통직에서 물러났다. 차이어도 이를 지지했다. …첫 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해 총리는 쑹자오런의 몫이었지만 암살당한다. 쑨원은 2차 무장혁명을 선언한다. 1913년 위안스카이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쑨원은 망명한다. … 친구가 위안이 황제가 되려 할테니 두고보라고 하자 “그럼 나도 서남에서 황제를 칭하겠다”며 웃었다. 1915 위안을 황제에 추대하려는 모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차이어도 “군주제가 되어야 한다” 성명서 첫머리에 서명했다. 백주에 기녀들과 공원을 산책하며 자신을 노출했다. 단정했던 차이어의 행동에 위안은 긴장했다. “황제가 되건 말건 네 멋대로 해라 . 나는 관여치 않겠다.”는 의미로 단정했다. 차이어는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치병에 전념한다며 병가를 신청했다. …차이어가 떠난 후 위안은 “명석함과 예민함이 당대에 차아어를 따를 자가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 상하이에 도착한 차이어는 윈난의 지휘관들에게 “선혈을 뿌려 이룩한 공화제가 군제제로 돌아가는 것은 4억 중국인의 수준과 인격의 문제”라는 서신을 발송했다. 칭치차오는 차이어의 편지를 받았다.
“실패하면 죽음이 있을 뿐 망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성공하면 은퇴하고 어떤 관직에도 나가지 않겠습니다.” 간단하지만 무서운 내용이었다.
1915년 여름부터 위안스카이를 황제에 추대하기 위한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위안스카이에 의해 베이징에 와 있던 차이어는 “중국의 국체는 군주제가 됨이 마땅하다”며 위장 지지 서명을 한 후 일본 요양을 명분으로 11월 11일 베이징을 떠났다.
위안이 황제즉위하려하자 전국이 요동쳤고 차이어도 찬성했다는 소문이 돌자 물가가 요동했다. 차이어가 돌아오고 나서야 물가가 안정되었다. 한 달 여 만에 일본, 타이완, 홍콩을 경유 쿤밍에 도착한 차이어는 “군주제 복귀는 국체에 대한 반역이다, 12월 25일 독립을 선포하고 동시에 기병하자”며 호국군을 결성했다.
1916년 1월1일 위안스카이는 황제에 즉위했다. 차이어는 쓰촨(四川), 충칭(重慶)을 거쳐 청두(成都)에 진입했고 위안스카이도 대황군(大皇軍) 10만을 편성했지만 호국군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전국에 반제운동(反帝運動)을 불러일으켰다.
차이어는 윈난 전역의 지휘관들을 소집해 “권력을 놓고 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선서에 서명을 요구했다. 위안 스카이는 1916.1.1 황제에 즉위했고 차이어는 쓰촨으로 진군햇다. “목숨을 살려준다. 당장 퇴위하고 출국해라. 황제 즉위에 공모한 회원들은 처형해라. 등극대전과 용병비용, 회원들 재산은 국가에 환급해라. 증손까지 공민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보냈다. …위안도 대황군 10만을 편성했다. 대황군 지휘관은 “차이어 말고삐 잡는 게 소원이었던 내가 어찌 이렇게 되었는지…”라고 했다고 한다. 3.22 위안스카이는 퇴위를 선언했다. 6월6일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차이어는 호국군을 해체하고 은퇴했다. 차이어도 34세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장례는 민국 최초 국장이었다.
장례기간 중 화류계 여성들이 저녁 6시에 일제히 그를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강산을 사랑했지만 미인을 더 사랑한 사람” (pp493 504)
26) 마지막 황제 푸이
“푸이 선생, 당신은 황제입니까 아니면 평민입니까?” 푸이는 현명했다. “평민” 이라고 답했다. 루중린의 입에서 “하오”(好) 소리가 터져나왔다. p539
27세에 수렴청정(垂簾聽政) 이후 국정을 장악한 지 48년 만에 74세의 나이로 서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1908년 11월 13일 선포된 조서대로 대청제국은 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 짜이펑(載)의 시대로 진입했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으로 청 제국이 멸망함으로 3년 만에 권력을 내려놓은 짜이펑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적당한 대접을 받다가 1951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청 왕조는 붕괴했지만 푸이는 여전히 궁궐에 머물며 황제의 존호를 유지했다. 위안스카이가 제시한 황실 우대조건 8개조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1924년 10월 21일, 서북군 총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이 출정 중이던 22여단장 루중린(鹿鍾麟)에게 회군을 지시했다. 루중린은 교외에서 베이징경비사령관과 회합했다. 베이징정변(北京政變)이었다. 1924년 11월 5일, 18세 청년 황제 푸이는 평민 신분으로 자금성에서 쫓겨났다. 생부 집에서 지내다 톈진의 일본 조계(租界)로 거처를 옮겨 6년간 머물렀고 만주를 점령한 일본이 만주국 황제로 추대하자 선뜻 받아들였다.
1961년 10월 9일, 신해혁명 50주년 기념식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대청제국을 뒤집어엎은 것을 기념하는 식장이었다. 푸이도 ‘신중국 정치협상회의 문사(文史)공작자’ 신분으로 참석했다. 10년간 전범 감옥에서 재교육을 받고 특사로 출감한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푸이는 톈진 대표로 참석한 루중린을 발견했다. 37년 만에 또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애들처럼 즐거워했다. 푸이의 회고록은 1959년까지만 기술돼 있다. 이날의 심정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pp517 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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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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