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은사에 대한 현대적인 입장
2. 기적적인 은사의 단절
1) 은사 중지론
①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
② 주장과 근거들
3. 결론
2. 기적적인 은사의 단절
1) 은사 중지론
①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
② 주장과 근거들
3. 결론
본문내용
기적적인 은사들이 가진 "사도적 증거의 창설성", 혹은 "계시성"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다시 성경의 정경성과 연관되어서 오늘날 정경이 완성된 상황에서 기적적인 은사는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다. 오늘날 나타나는 현상은 신약 성경에나타난 현상들과 특정한 유사성을 보여주는 비슷한 현상에 불과하다.
3. 결론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은사 지속론자들이 주장하는바 사도 시대의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지금도 동일한 목적과 강도를 가지고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분명히 성경은 근 본적인 은사 -사도와 선지자-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고, 이런 "교회의 터를 닦는 은사들"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령 운동을 하는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타나는 현상이 곧 복음인양 현상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이에 대한 체험을 절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재, 더 큰 체험과 기이한 현상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해 역사한다고 생각했던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 원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며,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소개하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진리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내주를 가르친다. 진리의 영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그러나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성령 운동은 표적과 기사가 가리키는 대상이신 그리스도보다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더욱 집중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우를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성령의 사역은 권능으로 치유하며, 방언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바로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으로서의 사역이며, 깨달은 진리대로 바르게 살아서 교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거룩의 영'으로서의 사역이다.
종교 개혁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대작「기독교강요」3권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 띠다"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곧 성부께서 그리스도 자신이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독생자에게 주신 그 유익을 우리들이 어떻게 받는가 하는 문제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주신 것은 예수님 자신만 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통해 다른 이들이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목적으로 성령을 받으시고, 그 능력을 사용하셨다면, 오늘날 그 분의 제자로서 성령 사역을 한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자신의 사역이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를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칼빈은 동일한 책에서 "그러나 믿음은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성령을 지금도 보내시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신비한 현상에 집착하고 기적적인 일들을 찾아다니도록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라남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13)"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오늘날 누군가가 기적적인 은사들에 대해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그 은사들 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될 때만 우리는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좋은 것",곧 "성령"의 선물인 것을 인정 할 수 있을 것이다.
3. 결론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은사 지속론자들이 주장하는바 사도 시대의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지금도 동일한 목적과 강도를 가지고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분명히 성경은 근 본적인 은사 -사도와 선지자-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고, 이런 "교회의 터를 닦는 은사들"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령 운동을 하는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나타나는 현상이 곧 복음인양 현상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이에 대한 체험을 절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재, 더 큰 체험과 기이한 현상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해 역사한다고 생각했던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 원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며,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소개하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진리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내주를 가르친다. 진리의 영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그러나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성령 운동은 표적과 기사가 가리키는 대상이신 그리스도보다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더욱 집중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우를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성령의 사역은 권능으로 치유하며, 방언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바로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으로서의 사역이며, 깨달은 진리대로 바르게 살아서 교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거룩의 영'으로서의 사역이다.
종교 개혁자 칼빈(John Calvin)은 그의 대작「기독교강요」3권에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 띠다"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곧 성부께서 그리스도 자신이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독생자에게 주신 그 유익을 우리들이 어떻게 받는가 하는 문제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주신 것은 예수님 자신만 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통해 다른 이들이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목적으로 성령을 받으시고, 그 능력을 사용하셨다면, 오늘날 그 분의 제자로서 성령 사역을 한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자신의 사역이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를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칼빈은 동일한 책에서 "그러나 믿음은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성령을 지금도 보내시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신비한 현상에 집착하고 기적적인 일들을 찾아다니도록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라남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13)"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오늘날 누군가가 기적적인 은사들에 대해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그 은사들 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될 때만 우리는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좋은 것",곧 "성령"의 선물인 것을 인정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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