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예배의 문제점들
1) 예배의 지루함과 진부함
2) 전통과 문화의 긴장에 따른 예배의 혼란
3) 예배 인도자의 형식적 예배 인도
2. 예배학의 과제들(tasks)
1)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참된 경배로 인도함
2) 전통과 문화의 긴장- 지혜로운 분별력
3) 예배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기도로 최상의 예배를 추구해 감
3. 종합 정리
1) 예배의 지루함과 진부함
2) 전통과 문화의 긴장에 따른 예배의 혼란
3) 예배 인도자의 형식적 예배 인도
2. 예배학의 과제들(tasks)
1)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참된 경배로 인도함
2) 전통과 문화의 긴장- 지혜로운 분별력
3) 예배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기도로 최상의 예배를 추구해 감
3. 종합 정리
본문내용
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한 우리를 향한 놀라운 구속 사건에 압도되어지고, 그러한 놀라운 일을 이루신 만주의 주가 되시며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을 향해 그분에 합당한 가치를 돌려 드리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사건을 축하하는 것이다. von Allmen과 Webber가 이 입장에 선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통해서 유월절에 이를 기념하면서 축하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초대교회 성만찬에서 성만찬 예전에 다양한 기도문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께 중심 잡는 행위이다. 하나님만이 최대의 가치가 있으며, 그러한 가치를 하나님께 합당하게 돌려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치 있음이 우리의 삶의 표준이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 놓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가치를 돌려드릴 때, 그러한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의 장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내면 깊이에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고 닮아가기 때문이다. 마음 깊이에서 물질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자들은 그 물질을 따라가고 그 물질을 닮아간다. 물질주의적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물질을 숭배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에 최상의 가치를 두고, 그에 합당한 경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따라가고 하나님을 닮아간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예배에서 예배자들이 간직해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과 ‘중심잡기’라는 사실이다. 예배자들은 예배에서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다스리시고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지시하시고 축복하시는-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예배는 일종의 “중심 잡기”이다.
예배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중심이 되는 자신에게로 모으신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시 93:1). 예배는 중심에서 모이는 집회이다. 이는 우리가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이 중심, 곧 살아 계신 하나님께 반응하면서 그리고 그분께 의지해서 살기 위해서이다. 예배하지 못하는 삶은 광고를 볼 때마다, 유혹을 느낄 때마다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그것에 좌우되는 발작과 경련의 인생으로 전락한다. 예배 없이 우리는 남을 조종하고 남에게 조종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어떠한 환란과 고통과 핍박이 오더라도, 또는 온갖 돈과 명예와 물질에 의한 우상 숭배의 유혹이 오더라도 하나님에게만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로만 중심을 모으는 행위이다. 하나님께만 예배를 집중함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왕으로 엎드려 경배하며, 그분의 가치만이 우리의 삶의 표준이 되게 하며, 하나님으로 형상화 되어가는, 그래서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Philip H. Pfatteicher, Liturgical Spirituality,
공동체로서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예배는 우리 피조물 됨에 대한 인정이며, 삶과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의존의 고백이다.” “예배 의식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세계관의 과감한 재질서(reordering)를 요구한다. 점점 더 우리 자신으로부터, 인류로부터, 인류의 필사적인 필요성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이동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로지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기까지.”
둘째, 그리스도의 사건을 축하하는 것이다. von Allmen과 Webber가 이 입장에 선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통해서 유월절에 이를 기념하면서 축하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초대교회 성만찬에서 성만찬 예전에 다양한 기도문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께 중심 잡는 행위이다. 하나님만이 최대의 가치가 있으며, 그러한 가치를 하나님께 합당하게 돌려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치 있음이 우리의 삶의 표준이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 놓는 것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가치를 돌려드릴 때, 그러한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의 장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내면 깊이에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고 닮아가기 때문이다. 마음 깊이에서 물질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자들은 그 물질을 따라가고 그 물질을 닮아간다. 물질주의적 인간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물질을 숭배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에 최상의 가치를 두고, 그에 합당한 경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따라가고 하나님을 닮아간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예배에서 예배자들이 간직해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과 ‘중심잡기’라는 사실이다. 예배자들은 예배에서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다스리시고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지시하시고 축복하시는-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예배는 일종의 “중심 잡기”이다.
예배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중심이 되는 자신에게로 모으신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시 93:1). 예배는 중심에서 모이는 집회이다. 이는 우리가 중심에서 이탈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이 중심, 곧 살아 계신 하나님께 반응하면서 그리고 그분께 의지해서 살기 위해서이다. 예배하지 못하는 삶은 광고를 볼 때마다, 유혹을 느낄 때마다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그것에 좌우되는 발작과 경련의 인생으로 전락한다. 예배 없이 우리는 남을 조종하고 남에게 조종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어떠한 환란과 고통과 핍박이 오더라도, 또는 온갖 돈과 명예와 물질에 의한 우상 숭배의 유혹이 오더라도 하나님에게만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로만 중심을 모으는 행위이다. 하나님께만 예배를 집중함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왕으로 엎드려 경배하며, 그분의 가치만이 우리의 삶의 표준이 되게 하며, 하나님으로 형상화 되어가는, 그래서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Philip H. Pfatteicher, Liturgical Spirituality,
공동체로서 교회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 “예배는 우리 피조물 됨에 대한 인정이며, 삶과 존재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의존의 고백이다.” “예배 의식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세계관의 과감한 재질서(reordering)를 요구한다. 점점 더 우리 자신으로부터, 인류로부터, 인류의 필사적인 필요성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이동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로지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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