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광해군 대의 경기선혜법에 대한 보고서 - 광해, 대동법을 반대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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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광해군 대의 경기선혜법에 대한 보고서 - 광해, 대동법을 반대한 남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대동법의 배경
대동법의 성립과정

본론

이원익의 경기선혜법
선혜법의 전국의 확대요구와 광해군의 강력한 반대
선혜청의 업무

결론


서론

본문내용

과 진휼모곡(賑恤耗穀 :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환곡제도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일정한 부가세를 붙여 거둬들임.)을 겸했던 상평청(常平廳), 진구(賑救 : 재해를 입은 자들을 구제함.)를 전담했던 진휼청(賑恤廳), 균역법(均役法)에서의 군관포(軍官布)와 결작미(結作米) 및 어·염·선세(魚鹽船稅) 등을 관리했던 균역청(均役廳)이 순차로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호조를 능가하는 최대의 재정기관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선혜청 [宣惠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처럼 선혜청은 조선 후기에 세입(歲入)의 대부분을 관장, 관리하면서 호조의 기능과 업무를 훨씬 능가했기 때문에, 의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했던 비변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존재와 기능에 적지않은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그 기능이 너무 비대했으므로 폐지하지 못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결론
조선은 500년 넘게 지속되었던 국가이다. 이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진단하고, 그에 대응하는 제도적 장치들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17세기의 조선이 직면했던 거대한 문제들 중 핵심은 민생과 세금문제였다. 궁극적으로 그 시대에 상응하는 제도적 공공성을 회복해야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p6
이에 광해군 · 인조 · 효종 · 현종 · 숙종대 100년 동안에 걸쳐 공납제(貢納制)를 폐지하고 그에 대신하여 전국에 확대 실시된 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그 중 대동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광해군 대의 경기 선혜법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대동법이 최근에 와서 다시 이슈가 된 것은 바로 2012년에 개봉했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가진 자들이 더 내야 하는 대동법을 반대하는 기득권의 정치세력과 대립하는 광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광대군 대 대동법의 실제 발안자는 오리 이원익이었고, 광해군은 이원익의 정치적 위상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을 뿐 재위기간 내내 대동법의 실시와 확대에 부정적이었다. 임진왜란 시 잠시 동안 시행되는 공물변통의 일환으로써 쌀을 공물 대신 받는 일도 많았기 때문에 광해군은 선혜법을 임시책으로 보았을 뿐 영화에서처럼 조세제도의 개혁군주로 보기 어렵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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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5.03.13
  • 저작시기2015.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59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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