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의 정책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의 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태종의 정책
 ① 관제개편
 ② 한양천도
 ③ 정치세력의 제거
 ④ 사병혁파
 ⑤ 호패법
 ⑥ 화폐개혁
 ⑦ 신문고제도
 ⑧ 억불정책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물론 신문고를 친 사람의 호소가 사실이면 해결해주고, 거짓이면 엄한 벌을 내렸다. 정당한 호소인데도 해당 관아에서 해결해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관아의 담당 관리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런데 신문고를 두드리는 절차가 매우 까다로워 실제 백성들이 이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 먼저 담당 관리에게 알려 풀지 못하면 다음으로 사헌부에 알려야 했고 그렇게 해서도 해결이 안 되면 그제서야 의금부의 허가를 받아 북을 칠 수 있었다. 다만 반란을 음모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한 자나 종친과 공신을 해쳐 변란의 꼬투리를 만들어내는 자를 고발할 때에는 순서를 밟지 않고 바로 북을 치게 했고, 이 경우 많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했다.
결국 백성들은 신문고 이용을 꺼리게 되었고, 신문고는 관리 출신들이 크고 작은 송사에 대한 항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신문고 제도는 이후 세종 때에 이르러 좀 더 활성화되었으나 특권층의 반발로 세조 때부터 폐지와 설치가 반복되다가 중종 대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⑧ 억불정책
조선왕조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말기에 전래된 주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주로 다루는 성리학을 신봉하고 있었다. 성리학의 토대가 된 공자의 학문이 철저하게 현실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 역시 그 같은 현실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성리학의 발달은 지극히 종교적이면서 비현실적인 경향이 강한 불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불교에 대한 탄압정책은 개국 초에 정도전 등에 의해 강하게 제기되었지만 태조 이성계가 불교 신봉자였기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 태조는 비록 신진사대부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불교에서 비롯된 폐습들을 시정할 생각을 가지고 잇긴 했지만 교단을 억제하거나 승려들을 제거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정종 역시 부왕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태종은 즉위 직후 환관들의 불심을 위해 마련되었던 궁중의 인왕상을 대궐 밖으로 옮겨놓게 하고 불교행사를 폐지시켰다. 1401년 1월에는 대신들이 불교 교단이 오교양종을 혁파하고 절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국가 공용으로 몰수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에 태종은 대신들의 척불 의견에는 찬성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당시 태상왕으로 물러앉았던 태조가 불사를 좋아하기 때문에 서두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이성계가 죽은 이후에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 말이었다.
그리고 1402년 태종은 서운관에서 불교혁파론을 상소하자 이를 받아들여 사찰의 토지를 군대에 예속시켜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노발대발하며 사찰의 토지를 되돌려주고, 승려들을 억압하지 말 것이며,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 바람에 태종은 하는 수 없이 불교에 대한 탄압의지를 일시적으로 꺾게 된다.
하지만 대신들은 이를 지켜보지 않았다. 바로 이듬해 사헌부의 관리들이 사찰에 예속된 토지를 몰수할 것을 강력히 건의하자 태종은 이를 받아들였고, 차례로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금지하고, 폐사찰의 전답과 노비를 국가 공용에 귀속하도록 하는 등 불교를 억압했다. 405년에는 급기야 전국의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혁파하였다.
이렇게 되자 불교는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였고, 불안에 휩싸인 승려 수백 명이 신문고를 치고 불교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태종은 탄압의 강도를 높여 불교 교단 내에 남겨둘 사찰과 승려, 노비, 전답의 수량을 확정하고, 종단마저도 축소시켰다. 이렇게 해서 조선 전역에 총 사찰 242사만 남게 되었고, 관아에 의해 몰수된 노비는 총 8만명, 몰수된 전토는 6만결에 이르렀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박영규, 웅진출판 p81-83
조선 초기 불교 탄압을 전개한 이유는 고려 말 불교 세력이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와 역성 혁명에 방해가 되는 문벌 귀족 세력과 결탁하여 고려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조선 왕조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정책이었다. 억불 정책은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정책과 더불어 숭유억불정책으로 진행되어 조선 사회에서 학문의 다원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다른 학문을 인정하지 않는 독단, 독선의 그릇된 예를 남겼다. 이는 결국 새로운 시대로의 개혁에 둔감하게 만들었으며 국력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억불정책은 조선이 유교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결실을 가져왔고, 고려와는 다른 조선만의 독창적인 성격을 가지게 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3. 결론
태종 이방원을 폭력의 군주, 피의 군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수많은 인물을 숙청하고 권력을 위해 아버지도, 형제, 친족도 내친 매정한 인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동은 조선 초기 불안정한 현실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통과 명분이 부족한 조선의 왕으로 그는 왕권을 강하게 확립함으로써 이를 극복해야 했고, 자신에게 방해가 될 만한 세력들을 모두 제거해 화근을 없앤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정책들은 주로 왕권을 강화하고, 건국 초기의 체제를 갖추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피의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백성들을 위한 정책은 많이 시행하였다. 비록 그 결과가 바람직했는지에 관해선 의문의 여지가 남지만, 그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염두에 두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정통성이 없었던 자신과는 달리 세종이 세자로 즉위하여 왕이 되기까지 명분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고, 세종에게 방해가 될 만한 인물들도 미리 제거함으로써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 세종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결론적으로 태종은 조선 초기 대표적 개혁군주로 악역을 도맡았지만, 그가 있었기에 조선이 자리 잡고 이후 수백 년 간 유지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4. 참고문헌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박영규, 웅진출판
한국사 이야기 - 조선의 건국 : 이이화, 한길사
새 왕조 조선의 밑그림을 완성한 군주 태종 이방원 : 이근호, 네이버캐스트
조선태종 이방원과 위나라 태조 조조의 비교연구, 오서남
  • 가격2,5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5.05.30
  • 저작시기2014.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7067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