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 이도의 호학(好學)하는 성품
▲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에 대한 실록의 평가
▲ 과도한 세종의 독서 - 눈병 걸리고도 책읽기 계속...
▲ 넓고 깊은 세종의 지식 - 수학, 중국어...
▲ 세종 사후 실록의 세종 평가
Ⅲ. 결론
Ⅱ. 본론
▲ 이도의 호학(好學)하는 성품
▲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에 대한 실록의 평가
▲ 과도한 세종의 독서 - 눈병 걸리고도 책읽기 계속...
▲ 넓고 깊은 세종의 지식 - 수학, 중국어...
▲ 세종 사후 실록의 세종 평가
Ⅲ. 결론
본문내용
명나라의 사신과 서로 접할 때에, 미리 그 말을 알면 그 대답할 말을 혹 빨리 생각하여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었다...
< 세종 22권 5년 12월 23일 (경오) 001 / 임금이 《통감강목》의 강독에 대해 언급하다 >
또한 중국과의 외교에 필요한 중국어의 습득을 위해 젊은이들을 중국의 학교에 입학시키려 했다고 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입학하기 위하여 가려 뽑은 자제(子弟) 20인을 모두 그대로 사역원(司譯院)에 모아 한문(漢文)과 중국말을 강습하게 하고, 사신이 북경에 갈 때마다 그들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62권 15년 12월 13일 (임술) 002 / 중국에 입학시키기 위해 뽑은 자제들을 사역원에 모아 한문·중국어를 강습케 하다 >
물론 이는 중국의 거절로 없던 일이 됐지만, 당시에 젊은이들의 어학공부를 위해 중국으로의 유학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로 세종의 생각의 폭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세종 사후 실록의 세종 평가
...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 세종 127권 32년 2월 17일 (임진) 001 /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
왕이 죽으면 사관은 상투적 미사여구로 그의 생애를 찬양한다. 세종에 대한 이 찬양 역시 같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세종의 집권기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번성하고 안정된 시대였다. 아버지 태종의 힘으로 왕권은 확고했고, 뒷날의 당쟁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도 없었다. 명과의 관계도 순조로웠으며 조선 조정에는 여진족과 일본, 그리고 유구(현재의 일본 오키나와 제도에 존재했던 국가) 등이 내조했다. 여진족과 대마도를 정벌할 만큼 무력도 있었다.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는 활기에 넘쳤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를 ‘해동의 요순’이라 일컫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Ⅲ. 결론
세종이 승하하던 날의 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 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 세종 127권 32년 2월 17일 (임진) 001 /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
알고 있다시피 조선의 문화란 거의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화의 대부분은 세종의 두뇌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세종은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했다. 나는 세종의 이러한 능력은 타고난 두뇌와 성실성에도 있겠지만, 끊임없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광범위한 독서를 통한 지식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쉼 없는 독서로 축적된 그의 지식이 바로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를 통틀어 그와 같이 학구열에 불탔던 왕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독서량이 지극히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지성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학생들에게 독서는 필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대학생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 역시 꾸준한 독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끊임없이 독서를 했고,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가졌었던 세종대왕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한글로 말이다...
♠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 이한우,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해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엮음, 『세종시대의 문화』, 태학사
☞ 김영수, 『세종의 국가경영』, (수업교재)
라고 하시었다...
< 세종 22권 5년 12월 23일 (경오) 001 / 임금이 《통감강목》의 강독에 대해 언급하다 >
또한 중국과의 외교에 필요한 중국어의 습득을 위해 젊은이들을 중국의 학교에 입학시키려 했다고 한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입학하기 위하여 가려 뽑은 자제(子弟) 20인을 모두 그대로 사역원(司譯院)에 모아 한문(漢文)과 중국말을 강습하게 하고, 사신이 북경에 갈 때마다 그들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 62권 15년 12월 13일 (임술) 002 / 중국에 입학시키기 위해 뽑은 자제들을 사역원에 모아 한문·중국어를 강습케 하다 >
물론 이는 중국의 거절로 없던 일이 됐지만, 당시에 젊은이들의 어학공부를 위해 중국으로의 유학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로 세종의 생각의 폭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세종 사후 실록의 세종 평가
...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 세종 127권 32년 2월 17일 (임진) 001 /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
왕이 죽으면 사관은 상투적 미사여구로 그의 생애를 찬양한다. 세종에 대한 이 찬양 역시 같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세종의 집권기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번성하고 안정된 시대였다. 아버지 태종의 힘으로 왕권은 확고했고, 뒷날의 당쟁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도 없었다. 명과의 관계도 순조로웠으며 조선 조정에는 여진족과 일본, 그리고 유구(현재의 일본 오키나와 제도에 존재했던 국가) 등이 내조했다. 여진족과 대마도를 정벌할 만큼 무력도 있었다.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는 활기에 넘쳤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를 ‘해동의 요순’이라 일컫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Ⅲ. 결론
세종이 승하하던 날의 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 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 세종 127권 32년 2월 17일 (임진) 001 /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
알고 있다시피 조선의 문화란 거의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화의 대부분은 세종의 두뇌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세종은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했다. 나는 세종의 이러한 능력은 타고난 두뇌와 성실성에도 있겠지만, 끊임없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광범위한 독서를 통한 지식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쉼 없는 독서로 축적된 그의 지식이 바로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를 통틀어 그와 같이 학구열에 불탔던 왕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독서량이 지극히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지성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학생들에게 독서는 필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대학생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 역시 꾸준한 독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끊임없이 독서를 했고,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가졌었던 세종대왕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한글로 말이다...
♠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 이한우,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해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엮음, 『세종시대의 문화』, 태학사
☞ 김영수, 『세종의 국가경영』, (수업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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