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작품 개관
1. 나자렛
2. 광야에서의 하느님의 모습
3.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고독
4. 길 위에서
5. 요르단 강, 에브라임
6. 예루살렘
7. 슬픔의 길
8. 텅 빈 무덤-부활
1. 나자렛
2. 광야에서의 하느님의 모습
3.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고독
4. 길 위에서
5. 요르단 강, 에브라임
6. 예루살렘
7. 슬픔의 길
8. 텅 빈 무덤-부활
본문내용
에서 두 가지 수수께끼를 풀려 한다. 하나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 우리와 같은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력하게 최후를 맞음으로써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렸던 예수가 어떻게 제자들의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구세주로 신격화될 수 있었는지이다. 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여러 파벌로 갈라져 있었기에 더욱 수수께끼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했지만 제자들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당시 유대 지역 종교에는 부활의 개념이 있었다. 성경에도 이런 장면이 있다. ‘헤로데’ 왕은 예수를,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는 장면이나 “엘리야의 혼이 엘리사에게 내렸다.”라고 말한 장면, ‘요한’을 ‘엘리야’의 부활로 설명하는 장면 등이다. 그런데 마가복음(9:9-14)에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한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런 내용을 볼 때 제자들은 예수가 말한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의 신념과 신앙이 자신들 안에 살아” 있는 것을 부활로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설하더라도 예수의 죽음 전과 후의 제자들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혼란, 절망, 후회의 감정을 동시에 겪었다. 여기에는 예수를 구하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의문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제자들이 체포의 위험이 있는데도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던 이유를 추측하면서 이 수수께끼를 풀려 한다. 그들은 이단자이거나 반로마 세력으로 체포될 수도 있었다. 더욱이 ‘베드로’는 성전 수비대에게 상처까지 입힌 인물이었다. 저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이야기와 예수 대신에 석방된 ‘바라바’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이야기는 4복음서 모두에 나온다. 마태복음(27:69-74), 마가복음(14:66-71), 누가복음(22:56-60), 요한복음(18:16-25)의 기록을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저자는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표로 예수와 함께 의회에서 재판받으면서 예수를 부인할 것을 ‘맹세’한 것으로 추측한다.(209) 예수를 부인함으로써 그들은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슬픔과 자기 경멸, 그리고 굴욕의 감정”에 휩싸인다. 즉 저자는 예수가 제자들 대신 제물이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제 제자들에게 예수의 희생은 말인 아닌 현실이 되었다. 남은 제자들과 ‘유다’는 다른 것이 없었다. 이제 제자들이 갈 길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계속 예수를 부정하는 것과 예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누가복음 23:34) 못한다고 두둔했다.
즉 예수가 죽음의 순간까지 보여 준 사랑과 희생을 제자들이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기대했던 것은 능력 있는 메시아였다. 이민족의 압제를 받았던 그들은 성경 속의 ‘비참한 구세주’(이사야 53)가 아닌 능력 있는 구세주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구원만(216)을 간구했던 ‘슬픔의 인간’인 예수를 본 것이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가 자기들 옆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누가복음 24:13-35) 또한 ‘텅 빈 무덤’ 사건은 예수의 부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했지만 제자들은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당시 유대 지역 종교에는 부활의 개념이 있었다. 성경에도 이런 장면이 있다. ‘헤로데’ 왕은 예수를,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는 장면이나 “엘리야의 혼이 엘리사에게 내렸다.”라고 말한 장면, ‘요한’을 ‘엘리야’의 부활로 설명하는 장면 등이다. 그런데 마가복음(9:9-14)에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한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런 내용을 볼 때 제자들은 예수가 말한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의 신념과 신앙이 자신들 안에 살아” 있는 것을 부활로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설하더라도 예수의 죽음 전과 후의 제자들의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혼란, 절망, 후회의 감정을 동시에 겪었다. 여기에는 예수를 구하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의문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제자들이 체포의 위험이 있는데도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던 이유를 추측하면서 이 수수께끼를 풀려 한다. 그들은 이단자이거나 반로마 세력으로 체포될 수도 있었다. 더욱이 ‘베드로’는 성전 수비대에게 상처까지 입힌 인물이었다. 저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이야기와 예수 대신에 석방된 ‘바라바’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이야기는 4복음서 모두에 나온다. 마태복음(27:69-74), 마가복음(14:66-71), 누가복음(22:56-60), 요한복음(18:16-25)의 기록을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저자는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표로 예수와 함께 의회에서 재판받으면서 예수를 부인할 것을 ‘맹세’한 것으로 추측한다.(209) 예수를 부인함으로써 그들은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슬픔과 자기 경멸, 그리고 굴욕의 감정”에 휩싸인다. 즉 저자는 예수가 제자들 대신 제물이 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제 제자들에게 예수의 희생은 말인 아닌 현실이 되었다. 남은 제자들과 ‘유다’는 다른 것이 없었다. 이제 제자들이 갈 길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계속 예수를 부정하는 것과 예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누가복음 23:34) 못한다고 두둔했다.
즉 예수가 죽음의 순간까지 보여 준 사랑과 희생을 제자들이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기대했던 것은 능력 있는 메시아였다. 이민족의 압제를 받았던 그들은 성경 속의 ‘비참한 구세주’(이사야 53)가 아닌 능력 있는 구세주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의 죽음으로 자신들의 구원만(216)을 간구했던 ‘슬픔의 인간’인 예수를 본 것이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가 자기들 옆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누가복음 24:13-35) 또한 ‘텅 빈 무덤’ 사건은 예수의 부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