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 관한 역사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6.25전쟁에 관한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Border 경계·경계선·분단·분단국가

- 6.25전쟁 발발 배경과 원인
- 6.25전쟁 경과 및 피해


본론

Mystery 역사에 대한 의문·의혹제기

- 비상 경계령의 해제
- 미국은 남한의 우호적 국가인가
- 왜 38도선이 되었는가

Curious 6.25전쟁 당시의 진위여부에 대한 궁금증

- 중국의 인해전술?
- 미국의 세균전?
- 여자 의용군 교육대?
- 미국의 민간인 학살 자행?
- 휴전협정 체결 시 남한의 승인 부재?


결론

Realization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자각·깨달음

본문내용

의 선무공작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00 여명의 정훈 선무대원들이 황해, 평남, 함남, 강원지역에 들어갔고, 이어 본격적으로 대 거 파견하기 위해 모집한 것이 정훈대대였다.
정훈대대의 임무는 북한 수복지구에 들어가서 공산분자들의 죄악성을 폭로시키고, 대신 대한민국의 이념을 계몽 선전하는 중요하면서도 위험이 따른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정훈 대대내의 여자의용군의 비중이 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할과 효과도 높았다. 정훈대 대는 전세의 변화로 이들 후속대원은 이북파견이 불가능하게 되어 결국 남한에서 대민 선무, 부대 정훈 등 다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라는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한다는 소명으로 오로지 나라의 안위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군 ‘여자의용군’은 대한민국의 힘을 보여주는 역사 적 보물이다.
- 미국의 민간인 학살 자행?
- 휴전협정 체결 시 남한의 승인 부재?
휴전협정에 한국대표가 빠진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뜻.
이 대통령은 국군 대표가 휴전협정 조인(서로 약속하여 만든 문서에 도장을 찍음) 참석 문제에 대해 육군참모총장 백선엽대장과 얘기를 나누다 “총장은 가지 않는 게 좋겠 다”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우리 측을 휴전당사자로서 명하기를 회피한 것은 휴전
이후에 대해 유엔, 즉 미국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구상 때문이었다고 함.
1953년 6월에 들어서면서 휴전회담의 진행상황이 드러나고 한국 곳곳에서는
‘휴전반대 궐기 대회’가 뜨거웠는데 그 때문에 미국이 곤혹스러워했지만 회담의 진전 이 멈추어지지는 않았다. 이런 시점인 6월 7일 한국에서는 전국적으로 준비상 계엄령 (계엄령:국가 비상시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헌법 일 부의 효력을 일시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하여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긴급권의 하나로 대 통령의 고유 권한) 이 하달됐고, 정부에서는 미국 방문 중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이하 전 장병에게 긴급 귀국명령을 내렸고 유엔군 측 휴전 대표단에서 한국 대표를 소환함.
이는 유엔 측이 1953년 5월 25일 기존의 입장이던 송환 거부 포로의 석방을 철회한 후, 6월 8일 공산측이 주장하는 포로교환 협정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이 에 대한 항의 표시로 한국군 대표의 휴전회담 참석을 거부하는 동시에 정전문제에 대 한 한국정부의 태도를 성명 (성명내용:“한국의 국토는 비록 황폐해졌으나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며, 적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몰아낼 때 까지 어떠한 유화정책에도 양보할 수 없다.”이와
때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38선상의 정전을 반대하면서, 38선의 정전은 곧 자살행 위라고 결의.출처:참고문헌-한국전쟁사1,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1967/판문점20년,김석영,진명문화사,1973/
한국전쟁사,김양명,일신사,1981) 을 통해 발표했다.
그 결과 한국군 수석대표 최덕신육군소장도 포로교환 문제에 있어서 유엔군측의 제안 이 종전의 내용과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철회하지 않는 한 휴전회담에 참석하지 않을 것을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에게 통고했다.
그 뒤 한국군 대표단은 1953년 6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최덕신 소장을 수석으로 하고, 이호 육군준장, 김일병 해군준장, 김창규 공군준장을 각 군 대표로 보 강하고, 이수영 대령을 연락장교로 하여 유엔군 기지에 복귀했으나 연락장교(연락장교: 타부대나 타군 또는 타국군 등에 파견되어 소속부대와의 연락업무를 수행하는 참모장교) 외에 는 정전협상에 참석하지 않았고, 정전협정 체결 시 유엔군사령관이 확인 서명할 때만 최덕신육군소장이 16개국 참전대표와 함께 배석했을 뿐이다. 출처:군사편찬연구소
-휴전 반대 인천 시민 궐기 대회
1953.04.25 인천공설운동장에서 6.25전쟁 휴전 방침에 반대하여 거행된 인천 시민 궐기 대회.
배경 : 6.25전쟁이 3년째에 접어들자 미국을 비롯한 국제 연합 참전국들 사이에는 더 이상 한국 에서 희생을 치를 수 없다는 여론이 높아져 갔다. 공산권도 승리 없는 전쟁에 대한 과중한 부담으로 인해 휴전 회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게다가 스탈린의 사망으로 인해 휴전 논의 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완강한 반대로 회담은 고비를 맞게 되고 1953년 6월 18일 반공 포로 석방으로 한국에서의 휴전 반대 움직임이 절정에 달하였다.
경과 : 1953년 3월 하순, 포로 송환 문제로 인해 정체되었던 휴전 회담이 재개되면서 휴전 반대 운동은 열기를 더해갔고, 4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토 통일이 이룩되지 못하는 휴전보 다는 차라리 한,만 국경선으로의 진격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미국과 유엔군 사령부를 겨냥한 결의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4월 6일에는 서울에서, 4월 10일에는 부산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집결하여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쳤고, 마침내 4월 25일에는 인천에서도 휴전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것임.
의의와 평가 : 한국이 휴전을 반대한 이유는 국토 통일에 대한 가망이 사라진 데 대한 울분과, 휴전 이 성립된 이후 제2의 6.25가 재발할 경우 이에 대처할 미국의 보장을 받지 못한 것 에서 비롯된 불안감 때문이었음. 한국정부는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고 전쟁 재발 억제 를 위한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의 현실화를 위해 인천을 비롯한 전국적 차원의 휴전 반대 운동을 활용함 출처:위키백과
Realization 6.25전쟁에 대한 우리의 인식·자각·깨달음
6.25전쟁에 대한 사실논쟁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기존의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들 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고 다시 생각해 보려는 관심이 가장 필요하 다. 우리의 역사인데도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대부분이기에. 우리 의 관심이 닿아 지켜낼 수 없는 숭고한 희생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미지 출처
- 전쟁기념관
자료 출처
- 전쟁기념관
- 6.25전쟁 60주년 사업위원회 - 군사편찬연구소
- 한국사 개념사전, 공미라, 김지수, 김수옥, 노정희, 김애경, 2010.6.4, (주)북이십일 아울북
- 국가기록원, 국가보훈처 블로그
- 6.25 미스터리, 이희진
  • 가격2,2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16.02.23
  • 저작시기2016.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9503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