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신학의 관점에서 본 원령공주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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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생태신학의 관점에서 본 원령공주에 대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미야자키 하야오(Hayao Miyazaki)와 생명/생태사상
2. 『원령공주』의 내러티브 분석
3. 『원령공주』의 캐릭터 분석과 생명/생태 사상
4. 『원령공주』의 이미지 상징과 공존의 한계상황
5. 『원령공주』의 이항대립을 넘어선 생태학적인 전망
6. 생태신학적인 전망에서 본 『원령공주』

나가는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는 한 이 구조를 전복한다는 것은 또 다른 대립을 불러올 뿐이다. 남성/여성의 이항 구조의 전복은 결코 인간/자연의 구조를 전복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들의 여성과 자연에 대한 동일화는 핍박받는 객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지나치게 사회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의 순진성을 드러낸다. 환경과 생태는 문제는 언제나 정치의 문제이지 휴머니즘의 순진한 발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생태문제를 둘러싼 권력의 구조를 우리는 분석해야만 한다.
자본주의의 구조를 배제한 성정치의 이항구조의 전복은 결국 이항대립을 뛰어넘을 수 없다. 권력은 언제나 이항대립의 구조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본은 이를 상품화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이미 권력 투쟁의 소재가 되었다. 극심한 성정치의 투쟁을 통해 권력은 자기정당성을 추구한다.
중요한 것은 생태학적인 사고이다. 이승재는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 투영된 생태론과 환경론에 관한 연구에서 최근 일부 환경주의자들은 어느덧 시장자본주의와 환경문제를 통합시킬 생각에 몰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환경을 덜 파괴하면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지속성을 모색한다는 것이 한계라는 것이다. 이승재, 185쪽.
환경을 대립항을 이루는 하나의 항으로 보고 그것을 단편적으로 관리하는 수준에서의 화해와 공존을 모색한다면 한계를 분명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문명이라는 환경 자체가 자연과는 대립적이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진단처럼 우리는 환경을 배경이나 대상으로 다루는 ‘환경주의(enviromentalism)’를 넘어서야 한다. 인간은 그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는 이항대립을 넘어선 인식론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6. 생태신학적인 전망에서 본 『원령공주』
김남석은 생태의 위기의 원인을 대략 여섯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 번째는 미국의 생태신학자인 린 화이트(Lynn White Jr)의 주장처럼 자연과 만물을 인간이 개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정의한 기독교 세계관에 그 원인이 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들에 대해 지배를 마음껏 행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인간을 자연의 우위에 두었던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전통이며, 세 번째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이다. 네 번째는 근대과학, 다섯 번째는 계몽주의이며 마지막은 자본주의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조 내지는 운동의 공통점은 자연에 대한 문명의 우월성과 감성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이다. 즉 인간중심주의를 견지하고 있다. 김남석, 50쪽.
미야자키 하야오는 『원령공주』를 통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시가미의 숲을 통해 일본인의 마음과 기억 속에 살아있는 원시적 생명력을 가진 원천을 제공했다. ‘신도의 숲’에 대한 일본인들이 품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와 무의식을 자극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의 배후에는 10년 이상의 경제 불황으로 자신감을 상실한 일본인들의 무의식이 강력한 시시가미와 같은 존재를 열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동옥, 19쪽.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망은 자연과 인간의 화해불능이라는 암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도 결국 자연을 인간에 대한 대립항으로 상정하면서 그 시원(始原)으로부터 잘못된 기초가 놓여졌다.
버나드 앤더슨(Bernhard W. Anderson)을 비롯한 생태신학자들의 지적처럼 인간은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자기반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서로에게 의존하는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은 또 다시 자연을 대상화, 타자화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연만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방식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방식으로 접근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버나드 앤더슨의 말처럼 이 세계를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거주하는 질서 있는 공간으로써의 ‘집’(oikos)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도구적이고 실용적인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론적인 시각으로 전환을 요구한다. 자연 만물은 인간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연만물을 창조의 섭리와 손길 가운데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좋다’라는 단어는 ‘선하다’, ‘아름답다’라는 개념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완벽한 질서를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질서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자연만물은 인식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존립 기반을 신적 기원에 두고 있다.
인간중심의 신학에서 생태중심의 신학으로의 전환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인간중심의 창으로 바라본 성서해석은 인간 스스로의 삶의 토대를 붕괴시키고 있다. 타자화된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지 공존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자연은 이제 있는 그대로의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 결국 생태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고, 또한 인간의 천박한 욕망의 문제인 셈이다.
나가는 말
이항대립은 결국 ‘타자화’(他者化에)의 문제이다. 자연을 타자화한 결과로 시작된 생태의 위기는 도시 뿐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생태신학적인 전망은 이제 새로운 출발의 단계에 서 있다. 인간을 자연 위에 두거나 혹은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의 구도 속에 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전망과 전망의 실천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의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있다. 생존 위기에 처해있는 북극곰의 이야기는 인간의 생존에 관한 직유이다. 이 시대의 상징이 가진 함의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한다면 인간은 고립된 계(界)에서 자멸하고 말 것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핵이나 무기의 문제라기보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거주지로써의 공간인 오이코스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인간의 삶의 방식 자체가 자연과 대립되는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독하게도 염세적인 전망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과연 이 전망을 넘어선 소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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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3.02.01
  • 저작시기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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