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 사상과 문학적 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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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의 사회경제 사상과 문학적 형상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 역사적 상상

2. 다산의 생애

3. 다산의 사회 경제 사상
1) 사회사상 - 논(論)을 중심으로
2)「전론」과 토지 문제

4. 다산사상의 문학적 형상화

5. 다산과 농민항쟁, 그 이후

6.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 주장하였다. 갑오농민전쟁에 있어 다산의 사상이 이론적 원천이 되었다는 견해인데『경세유표』별본이 비밀히 전해져 그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이지만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말하였다. 북한 학계에서 제기된 이 학설은 남한 학계에 진작 전해져 한 때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문제의『강진읍지』를 찾아보려고들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런 기록이 담긴『강진읍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산의 변혁사상이 그가 세상을 떠난 60년 후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발발한 농민항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겠다.
잘 알다시피 갑오농민전쟁 당시 폐정 개혁 12조안의 “2.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등의 조항은 물론 당시 농민군의 일반적 지향이었지만 다산 사상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기설화는 이후 박태원의『갑오농민전쟁』이나 송기숙의『녹두장군』에서 새로이 형상화되는데 이는 다산의 사상을 당시 농민항쟁의 주체 세력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시키려는 민중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익산민란’이 있은 지는 어느덧 한 달이나 넘어 경과하였고 ‘함평민란’이 일어난 뒤로도 이미 십여일이나 지난 오월 초하루, 한낮이 훨씬 기울어서 도솔암 앞 넓은 뜰이 나무 그늘로 반나마나 덮였을 때다.
……
“글쎄올시다……허지만 때가 되면 결국엔 세상에 나오게 되겠습지요.”
하는 대답이 젊은 중의 입에서 떨어지자 그는,
“옳지! 너도 그 비결이라는 게 세상에 나오기를 바라고 있구나.” 박태원,『갑오농민전쟁』, 깊은샘, 1989
이외에도 다산의 사상과 활동은 현재 몇몇 문학작품으로 형상화되었다. 대중소설로는 다산의 전기적 소설인『소설 목민심서』(황인경, 삼진기획)와 정조 독살설을 그린『영원한 제국』(이인화, 민음사),『다산 정약용』(문순태, 큰산) 등이 있다. 하지만 이들 소설은 말 그대로 대중성을 목적으로 한 글들이고 다산의 사상을 제대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김남주의 시「田論을 읽으며」를 들 수 있다.
이백 년 전 그대는
한 왕조의 치욕으로 태어나
조선의 자랑으로 살아 있습니다
가슴 속 핏속에 살아 흐르고 있습니다
귀양살이 18년 혹한 속에서도 그대는
만권의 책 담으로 쌓아놓고 고금동서를 두루두루 살피셨습니다
그 위에 다시 압권을 올려
한 시대의 거봉으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나라걱정 백성사랑 꿈엔들
한시라도 잊으신 적 있었으리요마는
때로는 탁한 세상 하 답답하여
탐진강 강물에 붓대를 휘저었습니다
哀絶陽이여 애절양이여 애절양이여
그러나 어떤가요 그 후 백여 년 지금은
여전히 농민은 토지로 밭을 삼아 땀 쏟아 일구고
여전히 벼슬아치는 백성을 밭으로 삼아 등짝을 벗겨먹고 있으니
한 시대의 굴욕으로 태어나
식민지 감옥에서 15년을 죽고 있는 나는
책 한 권 책답게 볼 수 없고
글 한 줄 적어둘 종이 하나 없습니다
흙 한 줌 사랑으로 만질 수 없고
햇살인들 한줄기 쬐일 수 있겠습니까
아, 다산이여 다산이여
그대 어둔 밤 조국의 별로 빛나지 않는다면
내 심사 이 밤에 얼마나 황량하리요
어느 세월 밝은 세상 있어 그대 田論을 펴고
주린 백성 토지 위에 살찌게 하리요. 김남주,『사랑의 무기』, 창작과비평사, 1989
11년 전 세상을 떠나 망월동에 묻힌 민족시인 김남주에게 다산의 시대와 80년대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농민은 토지로 밭을 삼아 땀 쏟아 일구고, 여전히 벼슬아치는 백성을 밭으로 삼아 등짝을 벗겨먹고 있다. 수 천 년 이어온 쌀농사마저도 갈아엎어야 되는 오늘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6. 맺음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민이 통치자를 추대한다는 발상을 하였다. 민이 통치자를 추대하는 것이므로 통치자는 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민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선생은 또한 토지의 사적 소유가 빚어내는 소유의 불균등, 수취제도의 불합리성, 군역제도의 폐단 등을 바로잡기 위해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토지 개혁안을 내놓았다. 백성이 그들의 통치자를 선택했다는 추대의 논리와 이에 근거한 교체의 논리는 유교 정치사상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객관적인 계기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근대적 민권주의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산의 사상은 이후 17, 18세기 농민항쟁의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산은 조선 왕조라는 봉건적 현실의 틀과 민본주의라는 유교적 이념의 틀 안에서 사회 개혁을 지향해 갔지만, 그의 사유는 종종 그 틀의 바깥을 넘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유교적인 틀 안에서 근대를 사유한 사상가’, 아니 ‘근대를 유교적 틀 안에서 사유한 사상가’가 정약용이었던 것이다. 그가 사유한 근대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이었느냐에 상관없이, 그의 이러한 이중성이야말로 근대화와 탈근대화라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참고문헌>
강만길 외,『정다산과 그 시대』, 민음사, 1986
김남주,『사랑의 무기』, 창작과비평사, 1989
박태원,『갑오농민전쟁』, 깊은샘, 1989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편,『정다산연구』, 한마당, 1989
송기숙,『녹두장군』, 창작과비평사, 1994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창작과비평사, 1993
이이화,『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한국사이야기15』, 한길사, 2001
정성철,『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 한마당, 1974
정약용 지음, 박석무 옮김,『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작과비평사, 2001
정약용 지음, 송재소 옮김,『다산시선』, 창작과비평사, 1981
정약용 지음, 허경진 옮김,『다산정약용 시선』, 평민사, 1998
정옥자 외,『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돌베개, 1999
최익한,『실학파와 정다산』, 국립출판사, 1955, (한국문화사 영인, 1996)
E.H 카 지음, 김승일 옮김,『역사란 무엇인가』, 범우사, 1998
박찬승,「정약용의 정전제론 고찰」,『역사학보』제110집,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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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5.23
  • 저작시기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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