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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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상황

2. 연구사

3. 생애,연보

4. 정약용의 문학관
1) 실사구시사상
2) 문학
ㄱ. 사실주의 수법
ㄴ. 주제와 소재
ㄷ. 경세적(經世的)인 사회시
ㄹ. 자주적 조선시
3) 문학의 특성
ㄱ. 다산학의 근본정신
ㄴ. 문장학 이론
ㄷ. 문체변용론

5. 문학사적 위치

6. 결론

7. 덧붙이기

본문내용

경작하지 못할 만큼 그 폐해가 극심하였다.
군정은 군적(軍籍)에 따라 번상병(番上兵)을 뽑고 보포(保布)를 정급(定給)하여 주는 병무행정이다. 15세기 말부터 번상병들이 보포를 내고 군역을 면제받는 관례가 생겨난 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정은 실제로 군포를 부과하여 거두는 수취제도로 변질되었다. 그뒤 양반세족들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과 여유있는 농민들은 모두 군역을 벗을 수 있어 군보(軍保)가 줄어들자, 가난한 군보에 대한 군포 징수는 도를 넘어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와 같은 불법징수가 성행하였다.
이와 같은 군정의 문란은 1750년(영조 26)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균역법(均役法)의 제정으로 부담이 줄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인 것은 그대로여서 가난한 양인들은 군포의 부담에 계속 시달렸다. 이러한 군포의 수취는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신분과 상관없이 호포나 호전(戶錢)을 내도록 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환정은 춘궁기에 농민에게 식량과 씨앗을 빌려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돌려받는 구빈(求貧)과 비축을 겸한 행정이다. 15세기 말부터 빌려준 곡식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보관하던 곡식이 자연 손실로 줄어들게 되자, 빌려준 곡식의 10분의 1을 모곡이라 하여 더 돌려받는 십일취모법(什一取耗法)을 시행하였다.
1514년(중종 9) 무렵에는 모곡의 10분의 1을 국가회계에 등록하는 제도를 만들어 환정을 국가세입의 일부로 정하였다. 임진왜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환곡은 계속 늘어났고 시간이 갈수록그 폐해가 본격화되어 19세기에 일어난 민란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⑦「애절양」
갈밭마을 젊은 아낙 오래도록 통곡 하네
현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 우러러 호곡하네.
전쟁에 나간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하지만
예로부터 스스로 남근 잘랐단 말 못 들었노라.
시아버지 소복 입고 갓난아기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올라 있네.
관가에 호소하려나 범 같은 문지기 지키고 있고
이정은 호통 치며 외양간 소를 몰고 갔다오.
칼 갈아 방에 가 남근 자르니 선혈이 가득
스스로 한탄하길 애 낳아 이런 환란 만났네.
잠실에서 궁형한 일 어찌 죄가 있어서며
민땅에서 환관시키려 자식 거세한 것 슬픈 일이도다.
아들딸 낳고 사는 이치 하늘이 준 것이라서
건도는 아들이 되고 곤도는 딸이 되는 것
말돼지 거세하는 것도 슬픈 일이거늘
하물며 후손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권문세가 한 해 동안 풍악을 울리면서
쌀 한 톨 베 한 치 세금내는 일 없누나.
다 같은 백성이언만 이다지 불공평한고
유배지에서 거듭 시구편을 읊노라.
⑧ <시구편>은 <시경>의 한 편명으로 뻐꾸기가 새끼 일곱 마리를 먹여 키울 때 한 마리도 거르지 않고 공정하게 먹이를 주어 기른다는 내용으로 ‘분배의 공정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봉건 왕조의 상황 인식 속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곽재구, 「곽재구의 예술기행」, 열림원, 2003.
⑨ 정다산이 시를 짓고 산문을 쓰는 목적도 어느 작가들과 달리 주로 경세적 이념과 애민우국의 정념으로 창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에 있어서는 문학은 목적이 있어 창작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미적 세계를 형상화해내는 것이지만 다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간절한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문학은 ‘외부로부터 억지로 이끌어 온 화려한 겉치례’-五學論) 中 文章之學라는 견해가 다산의 문학론이다. 김지용, 「경세제민의 혼신:다산의 시문 上」, 명문당, 2002.
⑩ '초계문신'이란 정조 임금이 국가에 유용한 인재를 기르기 위해 젊고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관료를 선발하여 규장각에 소속시키고 경전의 강론과 학문의 연마에 더욱 깊이 정진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는 초계문신으로서 학문연마에 전념하였고, 매월 시험을 치르는 원과에서 다섯 번이나 수석을 차지하는 우수한 성적으로 말과 표범가죽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금장태, 「다산 정약용 유학과 서학의 창조적 종합자」, 살림출판사, 2005, pp.48~49
⑪ ‘죽란(竹欄)’이란 명칭은 다산의 명례방 집에 대나무로 난간을 엮어 둘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였다. 이 죽란시사는 다산이 35세(1796) 되던 7월부터 39세(1800) 되던 8월까지 4년여 동안 젊은 동인들과 모여서 창작활동을 하였다. 당대의 문신학자문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15인은 나이가 비슷하고 사는 곳이 가깝고, 맑고 뛰어난 문장으로 모두가 등과하여 명신록에 대개가 올라서 명성이 높았으며 뜻이나 취향이 비슷하였으므로 시사를 결성하여 즐거움을 나누고 화훼를 노래하니 태평세월이었다고 <죽란시사첩서>에서 그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김지용, 「경세제민의 혼신:다산의 시문 上」, 명문당, 2002, pp.86~89
⑫ 그의 사상은 육경(六經-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 사서(四書-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의 주석에 나타나는 경학체계와 일표이서(一表二書-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에 나타나는 실학체계로 나누어진다. 경전주석에 있어 그는 훈고적 실증을 중시하는 한학(漢學)과 청나라 고증학의 경전해석 방법을 비판적으로 도입하고, 서학(西學)의 과학적 사고와 신앙체계까지 수용, 객관적 사실에 대한 분석적 입장과 실증적 방법을 통하여 인간 또는 사회적인 가치 속에서 실용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치인(治人)의 이념이 담겨 있는 일표이서는 정치제도의 구체적인 검토를 담은 것으로, 여기에는 중앙관리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귀양살이에서의 생생한 체험 등이 현실에 대한 인식자료로 제공되었다. 국가경영에 관련된 모든 제도·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경세유표》와, 지방의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목민심서》,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제시한 《흠흠신서》 등은 그의 정치·사회·경제사상을 총괄한 것으로서, 정박명절(精博明切)하기로 이름이 높다. 금장태,「다산 정약용 유학과 서학의 창조적 종합자」, 살림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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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20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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