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이름을 날린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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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에서 이름을 날린 한국인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중국의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우리 선조들
1) 당나라 무장이 된 흑치상지(黑齒常之)
2) 연개소문의 아들로 당나라 장수가 된 고려인 남생(南生)
3) 고구려인의 기백을 세계에 떨친 고사계(高舍鷄), 고선지(高仙芝)
4)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한문학의 대가 - 최치원(崔致遠)
5) 고려시대 불교의 지도자 의천(義天)

2. 중국에서 자리 잡은 한국인들
1) 베이징 - ‘연한미용실’ 김명권
2) 칭다오 - 중국 사람에게 한국 목욕을 가르친 사우나 왕 ‘코리아타운’ 조병두
3) 웨이하이 - 진짜 참기름으로 일어선 따이공의 전설 ‘서울상회’ 전용희

본문내용

해주었지만 둘 중 하나는 성공할 것 같기에 감행하였다. 물이 귀해 목욕을 안 하는 것일 뿐, 모든 중국인들이 다 목욕을 싫어해서 안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사업은 돈이 없어 목욕을 못하는 90%의 중국인이 아니라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10%의 상류층을 목표로 삼았다. 최고시설의 한국식 사우나를 만들면 그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드디어 1995년 9월, 모자라는 돈은 빚을 얻어 동업자와 함께 30만 달러를 투자해 칭다오 최고의 식당과 사우나 시설을 함께 갖춘 ‘코리아타운’을 탄생시켰다. 날씨도 화창한 그날,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33%를 투자한 동업자와 함께 손을 꼭 잡고, 식당으로 사우나로 밀려드는 90%의 중국 손님들과 10%의 한국 손님들을 감격스럽게 바라볼 수 있었다.
1백 평 규모의 코리아타운 식당과 2백 평 규모의 코리아타운 사우나의 성공은 4년 후 그에게 더 큰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1999년 10월, 칭다오의 황금상권인 세계무역중심건물 1층에 합자가 아닌 단독으로 10억 원을 투자해 산둥성 최고 설인 6백 50평 규모의 ‘수정궁 사우나’를 개업함으로써 칭다오에 한국 사우나 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로부터 물이 귀해 할아버지가 세수한 물로 아버지가 세수하고 그 다음에 아들이 세수했다는 중국 사람들에게 조병두는 일 년 동안 사우나 하는 법을 가르쳤다. 사우나 안에서 대화를 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냉탕에 죽어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을 설득해 냉탕으로 밀어 넣었고, 사우나가 건강에 좋은 이유를 설명하며 손님들과 친구가 되었다.
칭다오의 다른 중국 사우나가 요금 38위안을 받을 때 그의 코리아타운 사우나는 68위안, 수정궁 사우나는 88위안을 받으며 한국 사우나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식당에 있어서는 불고기를 주메뉴로 정하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조선족 주방장을 고용했으나 한국불고기가 아니라는 손님들의 비난으로 한 달 후 한국 주방장을 고용, 불고기와 한국의 솥뚜껑 삼겹살을 히트시켰다.
최고급 한국 식당과 최고급 한국 사우나에는 중국 최고 부자들만 오게 하겠다는 그의 소신이 승리한 것이다.
3) 웨이하이 - 진짜 참기름으로 일어선 따이공의 전설 ‘서울상회’ 전용희
중국말로 ‘따이공’이라 불리는 보따리장수들. 따이공은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서 의류나 액세서리, 생활용품 등을 중국으로 가져가 팔고, 중국에서는 고춧가루, 참깨, 참기름 등의 농산물을 한국으로 가져와 판다. 또 중국에 생산 공장이 있는 한국 사람들과 연계해 지퍼나 단추 등의 의류 부자재를 1kg당 2천 원씩의 수수료를 받고 운반해 주기도 한다. 한국에서 사업에 실패했거나 ‘명퇴’한 사람들. 중국으로 진출했다가 실패한 사람들 그리고 ‘한 건’ 올리기 위해 눈을 번득이는 검찰의 끄나풀들이 저마다 뒤섞인 배 안에서 전 재산인 보따리를 잃어버려 시련을 겪기도 하고, 끈끈한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탈 때는 분명 그 얼굴이었으나 내릴 때는 끝내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사연 많은 애환의 따이공들.
온통 붉은 색 지붕과 근엄한 표정의 인민군들이 인상적인 웨이하이에서 전용희는 친구의 중개로 중국 상점에서 고춧가루, 깨, 참기름 등 120kg이 나가는 물건 40만원 어치를 사서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따이공 생활은 2년 동안 계속 되었고, 1999년 12월 한국 돈 7백만 원을 들여 웨이하이 항구 앞에 4평 정도 되는 창고를 빌려 ‘서울상회’라는 상점을 열 수 있었다. 서울상회라며녀 지금 웨이하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상점이 되었다. 상점은 작고 허름해도 근로자 5백 명의 공장과도 안 바꾼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직원 없이 혼자 웨이하이 인근의 농산물을 싼값에 사들여 쌓아 놓았다가 인천에서 배가 들어오는 매주 수금일요일에 따이공들에게 약간의 이윤을 붙여 팔았다. 따이공 출신의 그가 따이공에게 물건을 공급해주는 도매상이 된 것이다. 그가 서울상회에서 취급하는 농산물은 주로 고춧가루, 깨, 참기름, 쌀, 잡곡 등이었는데 장사 경력이 좀 붙자 중국 농산물 중에 고춧가루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고춧가루를 15톤 정도 모은 다음 다음해 5월, 고춧가루 값이 킬로그램 당 22위안으로 뛰어올라 돈을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2톤을 풀고 났을 때 한국 언론에서 갑자기 대대적으로 ‘유해색소가 함유된 중국 가짜 고춧가루’ 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여 그는 졸지에 망하게 되었다.
피가 말라가며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던 어느 날, 고춧가루를 팔러 간 옌타이에서 참기름 공장을 하다 한국으로 철수하려는 50대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참기름과 자신의 13톤 고춧가루를 바꾸게 되었다. 참기름 짜는 기술을 배우고 산지에서 참깨나 흑깨를 사서 유압기계 2대로 진짜 순수한 참기름을 생산했지만 처음에는 판매처를 못 구해 8개월 간 놀기만 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직접 만든 진짜 참기름을 들고 한국에 들어가서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전국 대도시 식당과 김밥집을 돌아다니며 맛을 보여주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으로부터 서울상회로 참기름 주문이 쇄도하자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중국의 칭다오와 베이징, 단둥, 옌타이 등에 있는 한국 농산물상회나 식당에서도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놀기만 하던 참기름 공장이 말 그대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져 기술자 3명이 돌아가면서 공장을 24시간 내내 가동했는데, 지금도 참기름 공장은 24시간 풀가동하고 있다.
또한 10만 달러를 투자해 참기름 제조 법인인 ‘한성식품’을 설립하고 2층짜리 깔끔한 공장을 지었다. 모두 100% 순수한 진짜 참기름을 생산한 덕이다. 그 후 그는 해가 지면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웨이하이에서 2000년 5월에 50만 위안을 들여 ‘만만디 1(1백여 가지 온갖 메뉴를 판매하는 레스토랑 )’을 개업하고, 일 년 후 그 옆에 20만 위안을 투자해 ‘만만디 2(소금구이 전문점)’를 열었다. 특히 ‘만만디’라는 상호는 이미 중국 전역에서 특허를 받아두었는데, 중국 사람들의 대표적 마인드를 상호로 쓰고 특허까지 받아둔 그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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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9.14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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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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