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훈민정음에 대하여 세종의 친제(親制)임을 주장한 논문과 명분상의 어제(御制)임을 주장한 논문을 각 1편 이상씩 찾아 읽고, 그들 견해가 각각 어떠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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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어사]훈민정음에 대하여 세종의 친제(親制)임을 주장한 논문과 명분상의 어제(御制)임을 주장한 논문을 각 1편 이상씩 찾아 읽고, 그들 견해가 각각 어떠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 서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훈민정음에 대하여 세종의 친제(親制)임을 주장한 논문의 견해

Ⅲ. 훈민정음에 대하여 명분상의 어제(御制)임을 주장한 논문의 견해

Ⅳ. 훈민정음에 대하여 세종의 친제(親制)임을 주장한 논문과 명분상의 어제(御制)임을 주장한 논문을 각 1편 이상씩 찾아 읽고, 그들 견해가 각각 어떠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서술

Ⅴ. 결 론

[참고 자료]

본문내용

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집현전의 학자들이 한글 관련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한글이 이미 만들어진 뒤인 1444년 2월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공기의 중요성을 평소에는 잊고 살듯이, 언어나 문자 역시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자기 나라 말을 표기할 수 있는 적당한 문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 민족이 겪게 되는 고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러한 고통을 많이 겪어야 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사용해서 문자 생활을 영위하였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민족을 초월한 공통 문어 구실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한자와 한문은 공통의 문어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한자와 한문을 사용하여 문자 생활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자와 한문은 우리말과는 매우 딴판인 중국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자 및 문어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한자, 한문으로 표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래 글(문자 언어)은 말(음성 언어)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자가 오래 사용되다 보면 말과는 다른 독자적인 기능을 갖게 되어, 문어가 구어와 다른 특성을 갖게 되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어와 구어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문과 우리말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말과는 별도로 한자와 한문을 배우느라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한자를 가지고서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시도, 이른바 차자 표기법(借字表記法)이 등장하기는 했다. 우선 한문 속에서 우리 고유의 고유 명사를 표기할 때 한자를 빌려서 표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부터 차자 표기법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런 차자 표기법은 고유 명사 표기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먼저, 국가 상층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전 등의 중인층은 한문 구사 능력이 지배층만큼 능숙하지 못하였고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등을 동원하여 글의 뜻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하급 관리들의 공문서에서는 어순을 한문의 어순이 아닌 우리말의 어순으로 바꾸고 조사나 어미 등을 보충해서 표기한 변형된 한문이 사용되었다.
이것을 이두(吏讀)라고 한다. 또한 불교나 유고의 경전을 읽을 때 적당한 곳에서 끊어 읽기를 하게 되고 그 앞뒤 표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국어의 조사나 어미를 붙여서 명시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이것을 구결(口訣)이라고 한다.
한편, 자기감정을 진솔하게 노래로 읊을 때에는 아무래도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노래를 글로 옮겨서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경우도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읊은 노래를 한자를 빌려서 표기하게 되었는데, 이런 노래를 향가(鄕歌)라고 하고 이때 사용한 표기 방식을 향찰(鄕札)이라고 한다.
이렇게 차자 표기법이 발전하여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기에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문자였다.
우선 우리말에는 한자의 어떤 음(音)이나 훈(訓)을 빌려서도 나타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었고(예를 들어 의성의태어), 하나의 한자에 훈이 여럿 있는 것이 보통이어서, 차자 표기법에 사용된 한자를 어떤 訓으로 읽어야 하는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차자 표기법의 이러한 한계 때문에, 지배층이 한문에 익숙해질수록 차자 표기법의 사용은 축소되어 갔으며, 구체적인 표기 방식도 단순화, 투식화(套式化)되어 갔다.
이렇게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에서 당시의 지배층은 불편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반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지배층만이 한문을 배워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시험은 양반 관료로 편입되어 정치적 권력과 각종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반이었던 것이다.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자기들만이 어려운 한문을 배워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의 각종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들까지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의 출현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고 별로 반갑지도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세종이 일반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한글이라는 쉬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세종은, 기득권 계층이 한글 같은 문자를 만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반발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글 창제를 매우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임금께서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한글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4성(四聲)과 7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대단한 학문적 자부심을 내비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세종은 중국의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우리말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우리말을 표기하기에 적합한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뛰어난 학자였다는 것, 그리고 요양을 가서까지 한글에 대한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한글을 만들 만한 학문적 능력을 지닌 사람을 한 사람 꼽으라면 단연 세종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에 그토록 애착을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친히 만든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참고 자료]
이기문, 이호권, 국어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08
강규선, 훈민정음 연구, 보고사, 2001
강신항, 훈민정음 연구,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99
이상혁, 훈민정음 연구의 역사적 변천, 역락, 2004
강길운, 훈민정음과 음운체계, 한국문화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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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0.12
  • 저작시기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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