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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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단재 신채호


Ⅰ. 서론

Ⅱ. 생애와 역사연구
1. 제 1기
2. 제 2기
3. 제 3기

Ⅲ. 신채호의 역사의식
1. 자강론적 역사의식
2. 아와 비아의 사론
3. 낭가사상의 역사의식
4. 역사주체 인식의 변화

Ⅳ.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
1. 독사신론의 고대사 체계
2.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의 고대사체계
1) 상고사의 체계화 시도
2) 부여·고구려 중심의 체제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對漢族)투쟁면에서나 삼국의 상호관계에 있어서나 고구려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부여·고구려 중심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왕조가 부여로 계승된다고 파악한 것은 그의 <독사신론>에서 보여지는데 거기에서 단군의 태자로 부루가 등장하고 부여에 대해서는 “甚矣哉라, 아國史家의 멸식이여, 아國文獻의 잔결함이 수심하나, 단군 적통의 傳次한 부여왕조가 昭在하니, 설혹 당시 아東에 十國이 有할지라도, 왕족은 부여가 是니, 부여는 당당히 단군의 정통을 수(授)한 者어늘, 부여는 일자일구에 說及도 無하고, 기자만 구가(謳歌)하니, 鳴呼라, 基멸식이 어찌 此에 至하뇨.”라고 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나아가 단군이 곧 고구려 혈통직조라고 까지 발전하고 있다. 신채호 이전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조선 중기까지는 <단군→기자→위만>으로 계통화되고 삼한이 위만에 부(附)하여 삼국시대를 들어가게 되었으나 17·18세기에 이르러 정통론사상이 심화되면서 <단군→기자→마한>으로 체계화 되고 위만조선은 삼한에 대하여 참위(僭僞)의 국가로 낙인찍히는 고대사의 체계로 변화되었으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한국고대사 주류의 활동영역을 한반도 내로 축소시키는 것이 되었다. 또한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삼국시대를 삼국이 동등한 자격을 갖고있기 때문에 어떤 한나라에 정통을 둘 수 없다고 하여 정통이 없는 시기로 보고 통일신라이후에다 마한의 정통을 연결시키려고 하였으나 신라 및 한반도 중심의 한국사라는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이러한 종래의 인식체계를 극복하여 종래에 논란이 많았던 기자, 마한, 위만, 삼한 등을 부여·고구려에 부수되는 것으로 처리하여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제시하였다. 그의 그러한 인식체계의 수립은 그의 사학사상과 통하는 것으로 동일민족·동일문화의 기원을 단군조선에 고착시켜 한국고대사의 일관성을 주관적 신념으로 전제했다는 점도 있으나, 상고시대의 웅혼(雄渾)한 문화권 형성과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을 통하여 중국에 대한 문화적·정치적 사대주의를 타파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자강독립주의 사학정신의 발로로서 일제치하의 식민지적 상황의 타파라는 민족적 과제와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Ⅴ. 결론
신채호의 생애와 역사연구는 대략 3기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제1기인 역사연구이후부터 1910년까지 이시기에서 역사연구는 <독사신론>을 중심으로 삼한정통론을 극복하고 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이 나타난다. 역사연구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했고, 국난을 극복할 주인공으로 <영웅대망론>을 펼치며 국민적 역할을 강조했다. 국외망명기로서 1923년 조선혁명선언 발표직전까지인 제 2기의 역사연구에서 신채호는 만주에 있는 고구려·발해의 여러 사적들의 답사와 만주에서 대종교의 접촉에 영향을 받으며 <조선사>집필에 힘썼던 시기였다. 제3기는 신채호의 역사연구방법론의 심화된 기간으로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 등의 많은 고대사논문이 발표된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의 역사관계 논문들은 신채호가 1925년 아나키즘에 적극 참여하기 전에 저술된 것으로 반존화주의, 반주자학적인적인 성격과 민중사관이 나타난다. 또한 그의 연구와 인식이 보다 체계화, 객관적인 역사과학의 단계의 근대사학의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사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인식하고자,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관계>로 정의하였고 주체적인 <아>의 민족정신을 통해서 독립국가성립의 터전을 마련코자 하였다. 또한 그는 낭가사상을 발굴하여 우리 고유의 정신적 바탕을 구현함으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우리민족의 진로를 밝히려 하였다. 역사의 주체 인식에 있어서는 구권강탈 전에는 <영웅대망론>을 부르짖다가 후기에는 <신국민>설을 주장하였고, 국망후에는 <민중>을 제시하였다. 신채호의 고대사 인식은 기족 사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는 <독사신론>에서 한국고대사에 대하여 주종족과 강성에 대한 신역사적 인식과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 인식을 통해서 발해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민족사를 자주적으로 체계화하였다. 그가 밝힌 <삼조선>,<삼한설> 등은 공식화시키는데 문제가 있다고 보겠으나 종래의 삼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고 기존의 반도중심의 한국사 틀을 벗어난 고대사를 체계화 하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타파하고,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역사인식의 근거를 고대사의 체계화를 통하여 마련하고자 했다. 이와 같이 신채호의 역사의식은 유교적 중세사관 내지 사대주의적 존화주의, 그리고 일제의 식민사관 속에서 주체적인 민족사를 통하여 타율사관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점,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으로 재구성한 점 등은 오로지 역사로써 국권을 회복하려는 민족주의 사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에 입각한 역사의식이 비객관적·국수적이고 목적의식을 지닌 사학이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점은 당시 민족적 상황과 관련된 역사학의 과제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의 업적은 냉엄하게 비판받으면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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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룡(2006) 한국사 인물열전, 돌베개
윤택림(2006) 문화와 역사연구를 위한 질적연구 방법론, 아르케
역사학연구소(2005)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한국사연구회(2004)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이만열(1990)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문학과 지성사
강만길(1994) 한국사 23 - 한국사의 이론과 방법, 한길사, 1994
윤해동(2003)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이범직, 김종연(1999) 한국인의 역사의식, 청년사
신일철(1983) 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최홍규, 신채호의 민족주의 : 생애와 사상, 단제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84
이윤화, 역사교육논집, 양계초와 신채호 사학의 비교사론, 역사교육학회, 1992
김형수, 신채호의 역사의식에 관한 일연구 : 고대사 인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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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6.08
  • 저작시기20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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