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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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강웅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등 삶에 대한 강조는 좋지만 명령으로 서술을 담보하는 시도는 전적 은혜 교리를 훼손시키는 문제가 된다. 개혁주의 성화론은 도식적으로 보면 루터란과 재침례파 중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는데, 서술에 근거한 명령의 긴장된 평형관계를 항상 유지하는데 핵심이 있다고 하겠다.
칭의1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롬5:10) 칭의란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던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문제는 복음의 핵심 내용이며 기독교회는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써왔다.
왜 칭의라는 것이 있는가? 날마다 거룩을 향해 나가는 성화만으로는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나? 물론 칭의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칭의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겐 좀 더 신학적 답변이 필요하다. 그것은 주님이 심판 주로 재림하시는 심판의 날이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심판이 사실이 아니라면 칭의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칭의는 그 자체가 선포이지 과정이 아니다. 심판대에 섰을 때 의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칭의인데. 그 칭의가 그 순간 사람을 의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의인이라고 부를 뿐이다. 성도의 칭의는 그 미래적 칭의가 지금 나에게 약속되는 사건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칭의가 법정적이라고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칭의가 최후의 심판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칭의가 최후의 심판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칭의가 법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분상의 변화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칭의가 법정적 칭의라고 할 때는 위에서 열거한 의미를 갖는다. 칭의란 법정적이기에 칭의이다. 법정적이지 않은 특징을 칭의에서 찾으려 하거나 칭의에 포함하려 하는 것은 어떠면 성화의 개념과 혼동하고 있는 경우일 수 있다.
아담은 원래 의로운 존재로 창조 되었다. 의인이 되는 것은 치의 의미 전부라면 아담이 창조되는 순간 하나님은 아담을 칭의하시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 칭의의 근거는 행위 언약에 의해 설정되었다.
두 번재는 하나님을 칭의하는 경우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존재이심이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리스도를 칭의하는 경우이다. 성부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은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구속사역을 의롭게 여기신 사건이다. 넷째로 죄인의 칭의이다. 사실 성경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 죄인의 칭의이다.
근거없이 칭의한다면 그것은 허구일 뿐이다. 그렇다고 칭의가 근거를 만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대상자에게 칭의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 칭의이다.
성도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구원론 논의를 지배하는 방법론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의 구원이 완성 되었다. 디모데전서 3:16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언약의 머리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하에서 죽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긍정적 요구도 다 충족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가 이 의를 단번에 완성하셨다. 그의 완성된 중보사역만이 우리에게 전가 될 수 있는 의가 되는 것이다.
칭의 2부
우리가 칭의 될 수 있 것은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성부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으심의 결과이다. 즉 칭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느냐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달려있다.
그리스도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하는 데에는 구체적으로 기여한 부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이 각기 그리스도가 획득하신 의와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
죄인이 칭의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죄인에게 전가되어 그 전가된 의가 근거가 되어 칭의되는 것을 말한다. 칭의가 근거를 만드는 것이 아님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이때 믿음으로 전가되는 의가 죄인의 칭의를 위한 근거로 작용할 때 구체적으로 적극적 의와 소극적 의로 작용한다. 죄인에게 소극적 의는 모든 죄 값에 대한 보상이 된다. 적극적 의는 죄인이 순종으로써 이루어야 했던 공로가 된다. 즉 죄인이 율법의 긍정적 부정적 요구에 대해 직접 성취 했어야 했을 의를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우리의 것으로 누리게 된다.
칭의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단발적 사건이다. 칼빈주의 교리에서 우리가 구원이 단회적이고 한번 받은 구원은 다시 상실하지 않는 근거는 바로 우리가 칭의가 우리에게 단회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제까지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긍정적 차원에서 설명을 다 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되어 그 전가된 의에 근거하여 칭의된다고 이미 밝혔다. 그러면서 새삼 믿음의 도구적 기능에 대해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부정적 차원에서 경계해야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믿음이 “유일한 도구”인 “오직 은혜로”의 교리를 위협하는 세력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 새 관점과 17세기의 레몬스트런트들과는 구분되는 복음주의 알미니안을 들 수 있다. 새 관점 신학은 바울신학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언약공동체의 정체성으로써 언약적 율법주의를 낳았다. 로마카톨릭, 레몬스트런트, 새 관점, 복음주의 알미니안, 등은 공통적으로 “오직 믿음으로” 대신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는 섬에서 세미-펠리기안이다.
오직 은혜의 교리를 사수하기 위해 종교개혁 전통은 오직 믿음을 강조해 왔다. 행위가 어떤 모양으로도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칭의를 논하고 많은 경우 칭의가 구원여부를 가늠하기도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칭의가 구원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일부라는 점이다.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하나 구원은 거룩한 것이며,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성질이 있다는 점이다. 칭의가 구원의 일부라면, 칭의된 자의 삶에서 거룩이 발견 되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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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06.14
  • 저작시기2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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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2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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