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순교적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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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기독교회사 순교적 신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부활신앙과 순교자
III. 한국교회와 순교자
IV. 삼일운동과 순교자
V. 신사참배와 순교자
VI. 6.25와 순교자
VII. 결론

본문내용

자살 등으로 집단살해 하였다. 전국적으로 신도밀도가 가장 높은 평북 용천,의주 등은 연합군이 진주하지 못하여 어느곳보다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기뻐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참전은 민족에게 또 한번 뼈아픈 비극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혹독한 추위로 후퇴하던 군대들을 따라 남하하는 피난민들 속에 신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1.4후퇴 때 피난의 기회를 놓친 신자들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은 북한 내 교회당을 거의 불태워 교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북한에서 순교한 이들을 우리들은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나 그들 순교의 피는 깊은 광맥처럼 북한교회에 흐르고 있어 반드시 되살아나는 날이 올 것이다.
소련에 뒤진 미군은 한국백성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남한에 상륙하였다. 해방의 감격으로 지냈던 며칠사이에 소련군의 3.8도선 진주에 아연 질색했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교회지도자들은 미군상륙에 안도하였다.
남한교회는 북한교외에서 출옥성도들의 교회재건운동처럼 적극적이지 못했다. 총독의 종교정책에 의해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간부였던 지도자들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교권을 쥐고 있었기에 교회정화를 위한 통합된 교단지도자들로서 교단존속을 원했다. 그러나 각 교단들은 교단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남부대회는 무산되고 교단별로 교회재건이 이루어졌다. 북한교회와 같이 회개운동도 없었고, 해방 후 정치세력에 의한 핍박도 없는 가운데 재건되었다. 장로교회의 경우 출옥성도 손양원, 주남선, 한상동목사 등이 주도한 경남지역에서는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노회를 재건함으로 남한 교회재건이 시작되었다. 각 노회재건 후 교단을 구성하는 남부총회가 모였으나 참배 결의와 일제 침략정책에 방조내지 적극협력에 가담하였던 교회가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함으로 훗날 장로교열 분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 기독교단의 지도자였던 그들이 총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교회와는 달리 남한교회는 교권 장악에 힘썼던 소수의 교권주의자들로 시달리고 있었고 월남한 목회자와의 관계, 신학교 문제 등으로 어수선하였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은 남한에서의 교회수난의 시초였다. 호남지역에서도 교세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출옥성도인 손양원 목사 아들 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와 아버지 손목사의 원수사랑의 실천, 그리고 6.25때 손양원 목사의 순교 일화는 한국교회 순교사의 꽃이기도 하다. 새로 출발한 대한민국이 자리 잡음을 겨우 마칠 때, 남침을 위한 북한 공산당은 북한교회를 숙청하여 내부갈등을 최소화 한 후 1950년 2월25일을 기해 3.8건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하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파죽지세로 남한을 휩쓸고 내려온 공산군들은 낙동강 남동지역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너무나 빠른 국군의 후퇴 때 북한에서 공산당의 탄압을 경험하지 못한 남한 교역자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했다. 3개월 동안의 공산치하에서 용케도 견디어 왔던 교역자들은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더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당한 영. 호남지역의 공산군들은 10월 중순 수복 될 때까지 우익인사.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다. 특히 전남의 도서지역에서의 집단학살은 인간임을 거부하는 악독함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의 고생은 형언할 수 없다. 정신없이 후퇴하던 공산군은 목사와 우익인사들을 색출하여 북으로 끌어갔다. 허약하거나 병들고 지친 사람들은 가다가 아무 곳에서나 집단매장, 총살, 찔러 죽이는 등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순교, 납치 등의 인면손실 뿐 아니라 교회당의 소실, 파괴등도 수없이 많았다. 그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른 지 41년이 되었다. 빈번한 남북한의 접촉과 대회로 한반도의 통일이 성큼 다가선듯한 착각으로 지난날의 비극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전쟁이 책임자는 분명하게 밝혀져야 되고 신앙의 자유와 종교를 말살하려고 수많은 목사, 전도사, 장로와 일반신도들의 생명을 빼앗았던 공산정권이 죄악은 남김없이 기록되어져야 한다. 금수강산 3천리 방방곡곡에 흘려졌던 순교의 피들은 오늘도 쉬지 않은 채 한국교회를 지켜보고 있음을 믿음의 후손된 우리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옷깃을 여미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와 함께 걸어온 수난은 어느 민족이 겪어보질 못했던 자랑스러운 영광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을 감당할 수 있다고 보셨기에 그 영광을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성장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가 지금도 힘차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부르는 이름이어야 하고, 영광이며 노래여야 한다. 그리고 더욱 영광스럽도록 믿음의 후예들이 그 길을 따라야 한다.
VII. 결론
구약시대에는 짐승이 죽어서 피를 흘려야만 인간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고,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이 단번에 죽으셔서 우리 인류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대속해주셨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로 드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짐승의 피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믿음의 선진들의 무수한 피 흘림의 순교가 이곳 한국 땅에까지 이어졌다. 그 어느 나라보다 이 한국 땅에 많은 순교의 피가 지금의 많은 교회를 낳게 된 것이라 생각할 때 교회는 십자가 죽음위에서 순교의 피의 터전위에서 반석 같은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다시 알게 된다.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을 전수하기 위해 순교의 피를 흘렸듯이 지금 이 복음의 바톤을 이어받아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이 세대에 복음전도자들도 후세에 부끄럼 없는 본을 보여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죽기까지 헌신하고 충성해야 할 것이다. 죽음으로써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그야말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거룩한 사명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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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07.28
  • 저작시기20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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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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