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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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에 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폐모살제(廢母殺弟)
Ⅲ. 중립외교
Ⅳ. 궁궐 재건 사업
Ⅴ. 맺음말

본문내용

겨졌다가 강화로 돌아왔고, 병자호란이 있었던 1636년에는 다시 교동(校洞)으로 옮겨졌다. 1637년에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에도 19년을 더 살다가 1641년(인조 19) 7월 제주도에서 눈을 감았다.
광해군은 왕위 계승자로서의 정통성 결여 때문에, 또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세력들 때문에 늘 전전긍긍했다.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이후에는 왕권강화를 위한 사업을 쉬지 않고 벌였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감각을 바탕으로 전란 후유증 수습과 국가재건을 위한 여러 가지 치적(治績)을 남겼다. 광해군대에 이루어진 대동법(大同法)시행,『동의보감』반포, 사고(史庫)정비 등은 결코 만만한 업적이 아니었다.
‘인간 사이의 의리’로 보면 분명 문제되던 중립 외교정책은 당시 내외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끊임없이 명과 후금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외정책을 펼쳐나갔던 것은 분명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중립외교는 내부 정치와 조화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사대부들의 일반적 사상을 무시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 채 중립외교와 궁궐 중건사업 등을 몰아붙인 것은 그들의 긍지를 훼손하는 일이었다. 또한 당시 유교 윤리 이념에 위배되는 폐모살제와 더불어 결국 그들은 적대적으로 돌아섰고, 정변을 꿈꾸던 서인들은 이 같은 틈을 파고들어 인조반정을 일으킨 것이다.
광해군이 내정에서 좀 더 정치력을 발휘하여 신료들을 조정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비극적 결말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과 국왕으로서의 그의 행적은 결국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시대상황이 낳은 산물일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책-
오항녕,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한명기,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1988.
-논문-
계승범, 「광해군대 말엽(1621~1622) 외교노선 논쟁의 실제와 그 성격」,『역사학보』, 역사학회, 2007.
신봉승, 「폐모 살제의 진상」,『한글한자문화』139권0호,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2011.
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 광해군 다시 읽기」,『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98.
계승범, 「계해정변(인조반정)의 명분과 그 인식의 변화」,『남명학연구』,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 2008.
-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영경,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2015.06.15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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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8.12.11
  • 저작시기201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7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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