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경복궁 문화 답사견학문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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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답사기-경복궁 문화 답사견학문 리포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답사개요
2.답사일지
3.느낀점

본문내용

는 곳을 침전이라고 한다. 강녕전은 왕의 침전으
로 수, 부, 강녕, 유호덕(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고
종명(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의 오복에서 가운데에 해당하는 ‘강녕’
의 의미를 담아 이름 붙여졌다.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교태전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세종대왕 재위 중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교태전 뒤에는 아미산이라는 왕비의 후원이 있다. 계
단식 화단과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
낸 굴뚝이 아름답다. 1917년에 창덕궁
의 침전이 소실되자 일제는 목재를 조달한다는 명분으
로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 아미산 굴뚝
경회루
경회루는 교수님이 지인에게 말을 하셔서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부탁을 해본다고 하셨는데 잘 안된 것 같아서 아쉬웠다.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창건 당시 작은 누각이었던 경회루는 1412년에 연못을 크게 확장하고 누각도 큰 규모로 새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돌기둥만 남은 것을 1867년에 재건하였다. 경회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이며, 넓이 931㎡의 대규모 목조건물이다. 1층은 48개의 높은 돌기둥들만 세우고 비웠으며, 2층에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했다. 마룻바닥은 중앙의 3칸 중궁 부분이 가장 높고, 그다음 12칸은 한 뼘 정도 낮고, 바깥쪽 20칸은 다시 한 뼘쯤 더 낮은데,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품계의 관료들이 앉았다.
3
느낀 점
이번 경복궁 답사를 마치며 그동안 학창시절 동안 견학 온 경복궁 답사는 전부 수박 겉핥기식 지식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복궁은 조선 시대를 지배했던 유교 정신이 스며있었으며 왕이 살면서 나랏일을 돌본 공간이었다.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장인정신이 자랑스러웠고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경복궁은 일제 때문에 너무나 많이 손실을 보았다. 그 때문에 복원을 무수히 많이 했다는 점이 마음이 아팠다. 조선 시대의 아픈 역사와 아름다운 유산이 함께 공존하는 경복궁을 잘 보존하였으면 한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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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20.07.13
  • 저작시기202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13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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