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철원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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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주, 철원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양주별산대
Ⅱ. 보광사·용미리 석불
Ⅲ. 회암사(檜巖寺)터
Ⅳ. 전곡리 선사유적지

Ⅰ. 궁예궁터
Ⅱ. 백마고지 전적지
Ⅲ. 노동당사
Ⅳ. 도피안사(到彼岸寺)
Ⅴ. 한탄강·고석정

본문내용

가 드물고,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등 수도에서 벗어난 지방에서 더 많은 수가 제작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피안사상 역시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조성된 또 하나의 주류인 셈이다.
셋째, 철이라는 재료이다. 대좌까지 철로 만들어진 경우는 도피안사 철불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 원래 철이라는 재료는 동에 비해 다루기도 어렵고 또 섬세한 표현이 쉽지 않기 때문에 조각품으로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크기가 큰 철불일 경우 주조상 생길 수밖에 없는 외형틀의 이음매를 없애기가 어려워 상의 이곳저곳에 보기 흉한 주조흔이 남는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8세기 중엽부터 신소재인 철을 사용하여 철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 왜 철불을 만들기 시작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아직 정답은 모른다. 다만 도피안사상과 같은 철불의 조성지가 지방의 대찰들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지방호족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상과 비교되는 철불로는 광주철불이 있다. 광주철불은 현재 남겨진 철불 중 가장 크다. 광주철불과 도피안사철불은 ‘철’이라는 재료의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많이 다르다. 도피안사像의 얼굴이 갸름하다면 광주 철불의 얼굴은 둥글고 입이 작으며 인중이 짧다. 꾹 다문 작은 입에 짧은 턱에서는 긴장감이 엿보이는데,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 철불로 이어진다. 광주철불이 국가적인 강력한 후원으로 제작된 후삼국의 중앙양식이라면, 도피안사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지방양식을 대표하는 상으로 꼽을 수 있다.
<광주철조비로자나불좌상>
도금을 벗겨내고 다시 마주친 도피안사상은 예전에 보았던 기억 속의 상과는 전혀 딴판이다. 물론 도금을 벗겨내 철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고, 또 잃어버린 양 귓불을 새로 만들어놓은 지금의 이 모습이 865년 당시와 다를 수 있다. 짙은 색과 거친 표면의 철불을 도금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법당에 봉안하였을지는 의문이다. 그 모습이 어떠했든 간에 일체를 포섭하는 비로자나불은 당시 지방 민중들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존재였다.
중앙귀족 내부의 분열, 그리고 지방 세력의 신장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통일과 화합’이라는 문제가 절실한 과제였던 그들에게 비로나자불은 더없이 좋은 신앙대상이었다. 이곳 도피안사에 가면 이승의 번뇌에서 해탈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到彼岸’의 세계가 있고, 바로 그 한가운데서 철불을 만날 수 있다.
Ⅴ. 한탄강(漢灘江)·순담(蓴潭)·고석정(孤石亭)
1. 한탄강
한탄강의 수계는 평강군 현내면 산정리 에서 발원하여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남계리의 임진강에 유입하는 총 길이 136KM의 강이다. 맑은 물과 깎아지른 절벽, 그리고 울창한 수목이 어울려 뛰어난 풍취를 이루고 있는 이 한탄강의 유래담은 다양하다 옛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경덕왕 16년(757년)에 당나라 제도를 도입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대부분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기 전에 구전된 이 강의 이름은 섬내, 한여울 큰개울 등으로 불러 오다가 체천(切川)과 대탄(大灘)이라는 한자로 기록 되어 있다. 체천 즉 양안들이 섬돌 같은 것으로 올려 쌓은 것 같아 섬돌 체(切) 체자와 내 천(川)자로 또한 맑고 큰 냇물이 흘러 대탄(大灘)이라 한 것 등은 실체에서 따온 이름들이다. 한탄강이란 이름에는 역사적 배경 등 여러 유래담이 전해 오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한탄강이란 본래 \"한여울\" 즉 \"큰여울(개울)\"의 뜻으로 은하수와 같이 깨끗하고 넓고 길다고 하는 의미의 한(漢)자와 계곡과 절벽을 휘돌아 흐르는 여울이라는 뜻에서 여울 탄(灘)자를 붙여 한탄강이라 명명했다. 이 강은 강화도에서 생선과 젓갈 등을 실은 짐배가 임진강, 한탄강을 거슬러 올라와 전곡에서 차탄천의 유역을 이용, 용담에 이르러 상인들은 이 고장에서 생산된 농산물, 도자기 등과 물물교환을 하거나 물건을 사고팔므로 큰 시장을 형성했던 강이기도 하다. 이 강을 또한 한탄강(恨嘆江)이라고도 하는데 후삼국 시대에 철원에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부하인 왕건에게 쫓기어 명성산으로 갈 때 이 강을 건너가며 한탄했다하여 이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漢灘江 보다 恨嘆江으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민족분단으로 인한 비극이 이 강에 깊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해방을 맞은 조국이 날카롭게 대립된 자유, 공산 양 진영의 대치 장소로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자 자유를 갈구하는 많은 월남민들이 이 강을 건너다가 한맺힌 최후를 마쳤고 6,25사변 때는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간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이 산하를 피로 붉게 물들이기도한 한 맺힌 강이기도 하다
2. 순담(蓴潭)계곡
순담은 고석정에서 2㎞ 떨어진 곳에 있는 계곡을 일컬으며, 조선 영조(재위1724∼1776)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1691∼1767)가 요양하던 곳이다. 이름의 유래는, 순조(재위 1800∼1834)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1743∼1806)가 20평 정도의 연못을 파고 물풀인 순채를 옮겨다 심고서 ‘순담’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기묘한 바위와 깎아 내린 듯한 벼랑 등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계곡에서는 보기 드문 하얀 모래밭이 천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3. 고석정
<고석정 전경>
<임꺽정 동상 : 궁예가 부활한 것은 아닌가?>
고석정은 한탄강변에 있는 정자이다.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이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고석정기와 김량경의 시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 있다. 현재 2층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다.
<소설 임꺽정의 배경이 되었던 안성 칠장사 명부전의 벽화로 위 사진은 \'병해대사와 임꺽정 7두령\', 아래는 \'해소국사와 7인의 도적\'. 칠장사는 궁예가 출가했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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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5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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