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지역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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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주지역 유적답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원주개관
Ⅱ. 법천사(法泉寺)터
Ⅲ. 거돈사(居頓寺)터
Ⅳ. 비두리 귀부와 이수
Ⅴ. 흥법사(興法寺)터
Ⅵ.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와 신도비

본문내용

더 두드러져 이들을 위한 부도도 더 많이 세웠고, 또 양식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법천사지 지광국사 부도와 같이 아주 다른 형태의 부도도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고려 초기에는 통일신라 하대에 만들었던 팔각원당형 부도가 여전히 기본형을 이루었고, 그 안에서 세부적인 변화를 주는 정도였다. 고려시대 초기에 만든 대표적인 부도 가운데 가장 빼어나다고 꼽히는 것이 흥법사지 진공대사 부도이다. 폐사지가 된 흥법사에는 현재 수수한 멋을 간직한 삼층석탑 한 기(보물 제464호)와 조각이 화려한 진공대사 귀부와 이수(보물 제463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비신은 크게 깨어져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비문은 고려 태조가 손수 지었고, 글씨는 당 태종의 것을 집자한 것으로 유명하다.
진공대사 부도도 1931년 일본인에 의해 강제로 반출 시도되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부도는 전체가 팔각원당형의 기본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기단부의 중대석 커다란 원통형으로 하여 구름과 용무늬를 새기고, 기단부의 상대석과 하대석을 마주보는 연꽃으로 장식하였으며, 지붕돌의 처마가 높이 들려 처마선이 시원스레 들려 있고 추녀에 큼직한 귀꽃이 달린 점이 독특하다. 탑신받침 대신 상대석에 굄턱을 표현한 점, 지붕 아래 면에 불룩하게 배를 불리는 대신 층단받침을 새긴 점 등도 통일신라 시기의 팔각원당형 부도와 비교해 새로워졌다고 볼 수 있다. 탑신부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꽃 장식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목조 건축의 구조를 고스란히 모방하여 서까래와 부연, 막새기와까지 표현해냈다. 추녀 끝에 곧추 세워진 귀꽃 장식에서는 마치 새롭게 출발한 왕조의 자신감이 드러나는 듯하다. 진공대사 부도가 여느 부도와 다른 점은 부도의 옆에는 긴 상자 모양의 돌로 만든 함이 있다는 점이다. 불교 경전과 함께 관련된 유물을 담아두었던 석함인데, 뚜껑까지 완전하게 남아 있어 그 가치가 매우 높다.
* 전 흥법사지 염거화상부도(국보 제104호)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곤도 사고로)이 원주 흥법사터에 있었다고 전하는 것을 불법 반출하여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실패한 후 1914년경부터 서울 탑골공원 등 여러 곳에 옮겨졌다가 경복궁에 세워졌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이 부도는 서울로 옮겨질 때 신라 문성왕 6년(844)에 건립되었다는 금동제 탑지가 발견되어 조성 연대가 확실한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해방 전인 1929년 총독부와 해방 후 학자들이 원위치라 전하는 흥법사터를 조사하였지만 거기서 반출되었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해 현재로서는 원래 있던 곳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곤도 사고로가 도굴꾼으로부터 이 탑을 매수할 때 원위치에 대한 추구가 없었던 것이거나 불법반출에 따른 법망을 빠져나가기 위하여 원위치를 교묘하게 은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염거화상은 가지산문의 개산조 도의국사의 법을 이은 2조로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면서 선법의 포교에 힘썼고 보조선사 체징에게 법맥을 전하여 가지산문을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억성사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고증은 현재까지 없으나 홍각선사(양양 선림원지에 부도비가 있으나 비신은 파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염거화상의 마지막 주석처인 양양 미천골 선림원지를 억성사로 보는 학자도 있다.
4. 삼층석탑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하였다.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과 탑신의 불균형이 눈에 띄며, 돌의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소박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Ⅵ.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와 신도비
1. 의민공 김제남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 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에는 1601년 정언(正言)· 헌납(獻納)·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가 이조좌랑이 되었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로 뽑힘으로써 돈녕도정(敦寧都正)이 되었고, 왕비로 책정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扈從)하고 의주로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남았다가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였다. 1613년 이이첨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서소문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았으며, 1616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아들 셋도 화(禍)를 입었고 부인과 어린 손자 천석(天錫)과 군석(君錫)만이 화(禍)를 모면하였으니 부인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며, 천석과 군석은 숨어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묘소는 1624년(인조 2) 양주(楊州)에서 지금의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능촌으로 이장되었고, 김제남을 제향하는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있다. 신도비 비문(碑文)은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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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5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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