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이해 1학년) 1. 아래 문제에 대하여 교재를 참조하여 각각 서술해주세요. (서술한 문제당 6점, 총 3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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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의이해 1학년) 1. 아래 문제에 대하여 교재를 참조하여 각각 서술해주세요. (서술한 문제당 6점, 총 30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비교·설명해주세요.

2. 삼국사회의 신분제와 농민생활을 설명해주세요.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3. 신라 하대의 정치·사회 변동과 사상계의 변화를 설명해주세요.

4. 10~12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고려의 ‘외왕내제’를 설명해주세요.

5. 고려 후기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을 설명해주세요.

참고문헌

본문내용

4. 10~12세기의 다원적 국제질서와 고려의 ‘외왕내제’를 설명해주세요.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고려 거란 송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자 고려는 이러한 국제 관계 속에서 국가의 안정과 실리를 추구하였다. 고려는 거란과 공식적인 사대 관계를 맺어 조공을 바치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거란에서는 고려 국왕의 생일에 축하 사절을 파견하는 등 고려를 우대하였다. 고려는 송과도 사절단을 교환하였다. 거란의 압박을 받고 있던 송은 고려 사신을 대등한 국가 간의 사신인 국신사로 대우하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는 자국 중심의 국제 관계를 확립하였다. 탐라와 여진을 하위 세력으로 두어 지배층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조공을 받았다. 고려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여진 부족은 그 거주지를 명목상 고려의 군현으로 편제하고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왕의 복식이나 용어 의례 등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하게 하여 내부적으로 황제국의 체제를 갖추었다.
고려의 외왕내제 여부에 대하여 다루는 문서이다. 다만, 학계내에서도 아직 연구 중인 영역인 만큼 긍정론과 부정론 둘 다 서술되어 있으며 토론을 통해서 MPOV(다중 관점)가 적용된 상태이다. 현재로서는 고려전기 당시의 지적 환경(에피스테메)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은 만큼 원 간섭기 이전의 즉, 고려전기 국제(國制)의 모습이 정확히 어떠한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설이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고려는 중국 또는 북방 왕조에 대한 외형적 사대를 수용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자국의 군주에 대하여 천자 / 황제 / (대)왕 등의 위호를 칭하면서 독자적인 천하를 구축한 천자의 나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이중적 체제를 일컬어 학계는 외왕내제라고 부른다. 안으로는 지배층의 위상을 높이고 바깥으로는 국가적 실리를 추구했던 고려의 외왕내제는 해동, 즉 고려의 천자가 발해 · 여진 · 신라 · 후백제 · 탐라 등을 아울러 다스린다는 해동천하 인식으로 구체화되었다.
5. 고려 후기 역사 서술과 역사 인식을 설명해주세요.
우리나라에서 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史書는 仁宗代 金富軾의 주도 아래 편찬된 官撰史書인 『三國史記』(1145)이다. 이 사서는 종래의 기록을 그대로 轉載하고 說話와 神話를 기술하던 고대의 역사학으로부터 탈피하여, 나름대로 철저하게 문헌기록에 의존하였고, 또한 사료의 사실성 여부를 검토하면서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견지에서 역사적 諸事實을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시점에서만 역사를 논하지 않고 당시 동아시아세계에서 보편적 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던 儒敎라는 관점에서 자국의 역사를 인식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중세사학의 기초를 닦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三國史記』를 편찬한 金富軾은 우리 전통문화에 내재해 온 고대적 체질에 대한부정과 유교에 바탕을 둔 ‘道德的 合理主義 史觀’을 표방하여, 정치기사가 결여되고, 신화만이 남아 있는 고조선 관계 전승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조선에 대한 서술을 회피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12세기까지 고려사회에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고려전기부터 일부지역의 민간에서 단군신화가 전승되고, 황해도 九月山의 三聖祠에서 단군에 대한 제사가 행해졌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고 , 箕子나 衛滿에관해서도 숙지하고 있었던 사실을 문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간 신앙의 형태로 이어져 왔을 뿐이며, 고조선의 국가적 성장과 연관된 전승은 탈락하고, 신앙의 대상으로서 단군의 神聖性을 나타내는 고귀한 出自에관한 부분만 전해졌던 것이었다. 오히려 고려시대 주민들의 心底에는 단군과고조선에 대한 인식보다는, 三國別 分立的 역사 계승 의식이 끈끈하게 남아있었다.
고려시대까지 지리적문화적역사적으로 ‘그들’과 구분되는 하나의 실체인 ‘우리’, ‘우리나라 ’를 나타내는 대명사로서 ‘三韓 ’이 널리 사용되었다. 삼한이란 말은 원래 세 나라가 竝存해 있었다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 ‘우리 ’라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볼 때, 일차적 관심은 삼한과 삼국의 계승관계, 그리고 삼국과 고려의 계승 관계에 두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고려왕조가 취한 태도는 신라를 정통왕조로 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고려가 곧 고구려의 계승왕조임을 주장하는 二元的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문제는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와 얽혀 사회가 혼란해지면 표면으로 분출되어, 고려사회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서경파 妙淸과 개경파 金富軾의 대립은 周知의 사실이며, 12세기 무신집권기에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천민 봉기 중 일부 반란 세력은 삼국의 부흥을 내세웠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리 역사가 고조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든지, 우리가 淵源을 같이 하는 역사공동체에서 출발했다는 인식이 성립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즉, 고려 중기까지 단군과 고조선은 고려인들의 역사의식 속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전개된 것은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였다.
고려 후기에 고조선은 우리 역사의 起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고, 고조선에서 기원하는 단일 체계로 우리 역사가 파악되었다. 또한 조선 왕조의건국과 함께 고조선 계승 의식은 분명하게 정립되면서 조선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국호를 ‘朝鮮’이라 하였던 것은 13세기 이래 진전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고려 후기의 확산을 통하여 그대로 조선 왕조에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참고문헌
2017년 이후 출판 교재(송찬섭 외 공저,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김기흥,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 역사비평사, 1991.
이정호, 『고려시대의 농업생산과 권농정책』, 경인문화사, 2009.
구자옥, 「우리나라 농사일 문화의 성립·전개 및 연구」,『농업사연구』7, 한국농업사학회, 2008.
송호정. 2004.『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푸른역사.
박용운 외,『고려시대사의 길잡이』, 일지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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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3.11
  • 저작시기2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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