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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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序論

2. 本論
(1)이탈리아의 르네상스
1) 르네상스의 역사적배경
2)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3) 이탈리아가 르네상스를 선도한 이유
4) 이탈리아르네상스의 한계
(2) 해상왕국 베네치아
1) 바다의 여왕 베네치아
2) 베네치아의 탄생과 성장
3) 베네치아인의 무역
4) 베니스의 상인

3. 結論

본문내용

진 것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플랑드르의 모직물, 독일의 금속공업의 발달로 서유럽에 팔 물건이 늘고 그것에 따라서 갖고 싶은 물건을 보다 많이 살 수 있게 된 시기와 마침 일치했기 때문에, 오리엔트와 서유럽의 중개역을 하는 베네치아 상업으로서도 큰 비약의 기회가 되었다. 물론 베네치아는 이런 호기를 철저히 이용했다. 배의 개조가 그것이었다.
14세기 특색인 개혁의 두 번째는 상업기술의 진보였다. 그것은 우선 부기의 보급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아라비아숫자로 적은 복식 부기에 의해서 상인들은 자기가 직접 관여한 상거래의 전모를 알뿐만 아니라 해외의 대리인을 통해서 하는 간접거래도 포함한 장사 전반의 진행상태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유형 변화에 큰 구실을 하게 된다.
그리고 베네치아인의 발명은 은행제도를 창설하게 된다. 그때까지도 '방코'라고 불리는 은행은 있었지만 그것은 책상 위에 금화, 은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점포 구조로, 환전 업무를 주로 해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금업이었다. 한편 베네치아인이 만든 은행은 장부만 책상 위에 놓은 점포 구조였기 때문에 '방코 디 스크리타'라고 불렸다.
t상인들은 거래가 성립되면 은행으로 갔다. 그들은 모두 계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의 계좌에 이만한 액수를 옮겨달라고 은행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은행가는 장부에 그것을 기입했다. 이것으로 돈은 움직인 것이다. 종전처럼 금화나 은화 자루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계좌로 돈을 옮겨도 은행가는 그것을 증명하는 영수증과 같은 것은 발행하지 않았다. 은행의 장부는 복사되어 정부의 그것을 담당하는 위원회의 감시를 항상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인은 보통 복수의 은행과 거래가 있었으며, 베네치아 상인과 거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각국의 상인들은 그 대부분이 베네치아의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좌간 돈의 이동은 보통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의 상거래도 일단 성립되면 베네치아의 은행과 상대 은행간의 조작으로 환어음에 의해서 먼 지방에서의 지불도 전혀 문제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상업면에에서 뿐만 아니라 함대 편성이라든가 대사관의 비용 등으로 돈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는 국가로서도 대단히 합리적인 변혁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800년이나 전에 이 정도의 근대적인 은행을 생각해냈던 베네치아인은 은행 업무의 하나로서의 융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 방면에 있어서 주된 융자 대상은 국가였다. 마침 그 무렵은 제노바와의 백년전쟁이 일어났다가는 끝나고 휴전했다가는 시작되곤 하는 상태가 한창이던 시기여서, 국가는 전비조달에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개개 상인에 대한 융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융자이지 투자는 아니었다. 그런 처지를 이용해서 기업경영으로까지 진출하는 일은 없었다.
국가에 3천 리라의 보증금을 적립하고서 다음에 개점을 했으면서도 돈을 너무 많이 빌려주어서 뒤처리하느라 고생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베네치아의 은행에서는 다른 나라의 왕에게 융자를 주었다가 그 왕이 싸움에 졌기 때문에 본전을 찾지 못하게 되어 도산하는 것 같은, 동시대의 피렌체에서 일어났던 현상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베네치아 경제계의 주역은 은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었으며, 은행은 상인의 일을 합리화하여 그것이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측면지원을 하는 역할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베네치아인은 그들 나라를 사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운영했다는 평을 듣는 국민이었다.
3. 결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거친 많은 국가들 중 베네치아에 대해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문화의 피렌체나, 무역의 제노바등 많은 나라들이 생기고 사라져도 베네치아는 그들 가운데서 꿋꿋이 1천년의 역사를 지탱하고 발전시켜 온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결국 무역에 의해 큰 세력을 키운 도시들과 그 지배층인 상인들이 바로 르네상스를 가능케 하였다. 물론 이들 외에도 이탈리아가 고대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많은 옛 유물을 간직하였고 비잔틴,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알프스 이북 유럽지역에 비하여 가깝게 받았다는 점도 있지만, 베네치아가 그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가능케 했고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한 사실이기도 하다.
확실히 베네치아는 공화국의 국민 모두의 노력이 낳은 산물이다. 베네치아공화국만큼 반영웅(反英雄)으로 일관한 나라는 없다. 그러나 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이 놓여 있는 환경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놓여 있는 환경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행동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이해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는 결합되지 않는 법이다. 서민에게는 어떤 계기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6세기에 아틸라로부터 도망쳐서 갈대가 나 있을 뿐인 소택지대에 정주했을 때도 계기가 있었다. 굉장한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 틀림없는, 항구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무(無)에서 다시 시작한 베네치아인 들은 앞은 바다이고 뒤는 야만족 내습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한계적 역경에서 베네치아인 들은 불굴의 의지와 합리적 정신으로 바다의 일부인 개펄지대(라구나)의 바닷물과 개펄을 잘 관리하여 안전하고도 건강하며 온갖 산업활동과 공공활동도 가능한 한 수상도시를 건설한다.
자원이라고는 없는 자그만 나라 베네치아가 바다로 활로를 찾아 무역입국으로, 지중해의 대국으로 성장하여 열강과의 갈등 속에서도 번영을 누리면서 수백 년을 버티는 과정은 정말 대서사시 같은 느낌을 같게 한다.
참고문헌
1)시오노 나나미, 『바다의 도시 이야기』, 한길사 , 1996.
2)시오노 나나미, 『레판토 해전』, 한길사 , 1998.
3)시오노 나나미, 『콘스탄티노플 함락』, 한길사 , 1998.
4)장 도르메르 , 『베네치아의 해관 1.2.3.』,미세기 , 1996.
5)류정아,『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보이는 부르크하르트의 역사인식』, 전남대학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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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06.21
  • 저작시기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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