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락서재재재론-도산서원의 교육적 기능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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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선사강학소립사치제]의 전형적 서원인 도산서원의 일곽을 이루는 도산서당은 어떤 경과를 거쳐 성립되었는가?

2. 역락서재에 관하여

본문내용

한 流沒之事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해에는 한국 사액서원이 처음으로 생긴 동시에 형의 죽음에 의한 俗世無常觀의 형성이 있었던 것으로 선생에게는 인생의 커다란 전환의 해였다고 여겨진다. 그 때 선생의 나이는 50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해는 「從遊之士日衆」하여 선생의 대교육가로서 출발확립의 해이기도 했다. 앞의 언행록에 의하면 김성일은 그 6년후인 명종11년 병진(1556년)의 해에 「始展拜於此」했는데 그때의 모습을
「左右圖書焚香靜坐 然若將終身人不知爲官人也」
라고 쓰고 있다. 실은 앞서 나온 陶山雜詠의 記에 선생 스스로가 「藏書卷拙之所」라고 기술하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였던 것으로 이 장서권졸지소인 寒栖庵이 동시에 그대로 「從遊之士」의 「藏修之所」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이상적 상태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조초기의 「書齋書堂」의 전형은 실로 이 寒栖庵에서 볼수가 있는 것이다.
선생은 그후 명종12년 丁巳(1557년) 선생 57세의 3월, 서당의 자리를 새로이 도산의 남쪽에 얻었다. 이때의 「改卜書堂地有感」의 2수 및 「再行視陶山南洞」의 시에 선생께서 「宿願」의 「百歲藏修地」를 얻은 기쁨을 읊어내고 있다.(내집 권2, 40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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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에 의하면 陶山書堂, 雲精舍는 명종 15년 경신(1560년)에 「成」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도산잡영의 記에는 「신유」(1561년)가 되어서부터 「堂舍粗成可棲栖息也」라고 되어 있고 완성시기에 대해서 1년의 차질이 있다. 언행록의 鄭惟一의 箚記에는
「……卜地於陶山 築地藏書 地在江上 冬日甚寒不能居 春夏則常處其中 ……」
이라고 한 것을 보면 庚申年에 당의 건축이 이룩된 즈음의 전후의 시기에는 선생은 아직 寒栖庵과 도산서당을 겸용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완전히 완성하여 도산서당에 通年 오로지 기거하게 된 것은 「十八絶」의 시가 지어진 즈음으로 신유년이 아니면 그 전후가 아닌가 추측된다. 寒栖庵에서 도산서당까지는 산넘어 길을 걸어 도보로 약 15분의 行程이라고 李根必 선생은 일러주었다.
위에 언급할 芝軒 鄭大誠이 선생을 뵈옵게 된 것은 지헌이 17세 되는 해였으므로 난 해를 한 살로 쳐서 계산해보면 이후 신유년에 해당한다. 즉 이즈음부터 선생은 도산서당에 常居하고 從遊士子의 교육도 한층 본격화한 것이다. 선생은 도산의 당사가 「甚合所求 夢寐間常在此中」이라고 그 未成의 시기부터 말해왔고(言行錄 金富倫箚記) 봄·여름의 시기에 여기서 기거하시게 되었을 때부터 「若無當世之念矣」(언행록, 정유일)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학문연구와 士子교육에 선생은 애오라지 전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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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도산의 땅, 즉 퇴계의 충족한 「강학지소」에 도산서원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그것은 서원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顯現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亦樂書齋에 관하여
도산서원의 「西短麓上」(禮安郡邑誌)에 있는 亦樂書齋에 관해서는 鄭枓가 그의 아들 子誠受業을 위해 세웠던 것이요, 필자는 그 築營年과 士誠入門年과 퇴계선생의 扁額手書의 삼자의 시간적·명칭적 관계가 분명하지 않고 또한 도산서원 성립 후의 기능상황도 불명하다.
그러나 그후 「大山先生文集」권49, 「芝軒鄭公行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것을 閱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점차 명확해져서 「亦樂書齋再論」이란 제목의 小論(「武藏大學 人文學會雜誌」 제5권 제3, 四合倂號所收)에 그후의 追求를 써두었으나 지난번의 현지방문으로 사정이 더욱 밝아진 것이다.
芝軒 鄭士誠은 7세에 퇴계선생의 문인 金惟一齋에서 배우고 그 후 한가지로 퇴계선생의 문인 具柏潭 金芝山한테서 배운 다음
「許年十七 謁李先生 于陶山仍請業……」
이 때에 이름을 士誠이라 명하고 선생한테서 그것을 手書하여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右尹公爲公構小齋於陶山 使之居學先生 名其齊曰童蒙 願謂公曰爾須 刻 用工母負親庭之望也……」
이에 의하면 최초에 세워진 小齋는 정사성이 17세에 입문한 해 즉 사성의 탄생한 해 「嘉靖 을사」(인종6년 1545년)에서 산정하여 명종16년 신유(1561년)에 세워진 것이며 그 해는 도산의 堂舍가 완성된 해이고 따라서 퇴계선생이 도산에 常住하시게 된 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小齊의 명칭은 「童蒙齋」였던 것이나 도산서원의 현재의 관리자 李源由선생이나 李根必선생의 말하는 바에 의하면 최초의 이 童蒙齋은 초가집의 작은 齋舍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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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연보 「庚申」條에는 「陶山書堂成」이라고 되어 있고 선생이 「左右圖書 俯讀仰思 夜以繼日」하여 怡然自得 所造益深이었다고 적혀있고 그 뒤에 계속해서
「……其後學徒於精舍之西築室以處 名曰亦樂 取論語自遠方來之義也」
라고 적고 있다. 이 「其後」은 어느 해를 말하는가? 앞서나온 「禮安郡邑誌」에는 雲精舍의 「西短麓上」에 있는 「亦樂齋」는
「鄭枓爲其子士誠受業而營築 扁額李滉手書」
라고 되어 있으나 「芝軒仰公行狀」에 적혀있는 「童蒙齋」와 「퇴계선생연보」에 적혀있는 「亦樂書齋」와 이 「亦樂齋」는 도대체 어떤 관게에 있는 것일까를 필자는 잘 알 수가 없었다. 「亦樂書齋」의 營建年은 명확치 않으나 퇴계선생이 扁額을 手書한 것이었으므로 「其移」라는 것은 辛酉(1561년경)∼庚午(선생의 沒年, 1570년)간의 이른 시기라고 생각된다. 「亦樂書齋」라는 것은 鄭두가 세운 「童蒙齋」를 改築(地點은 약간 다르지만)하고 개명한 것으로 친구가 있어서 먼 데서 온다는 뜻을 취했다고 함으로 그것은 역시 「童蒙」이 수업을 위해 「居」하는 곳이 아니라 從遊之士가 群居肄業을 위해 찾아와서 유숙하는 精舍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亦樂書齋」는 雲精舍의 새로운 支舍가 된 것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점에 관해서 도산서원 성립의 諸契機의 교육사학적인 종합적 論究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지만, 문제는 이번에 명백해진 도산서당 성립의 구체적 경과와 亦樂書齋 성립의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도산서원 창건사액 이후의 이러한 서당, 서제, 정사를 포함한 전체로서의 도산서원이 여하히 교육적으로 기능했느냐에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도산서원의 「院規」를 기본으로 하고 이번에 閱覽書寫할 수가 있었던 「講會錄」이나 「講會日記」에 의거해서 금후 상세하게 추구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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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정 암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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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04.26
  • 저작시기2002.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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