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퇴계의 지적자아 정의의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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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째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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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할만큼 충분한 시간을 결코 갖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사소한 일에 자신의 精力을 분산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王이 새로운 官爵을 부여하며 그를 서울로 계속하여 소환하고자 할 때마다 더욱 강해졌다. 자신의 벼슬을 사퇴하는 辭狀을 잴대마다 그의 품계는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그가 명성을 얻고자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558년 가을 내키지 않는 內京을 하게 됨을 퇴계는 하나의 재앙처럼 느꼈다.
) Ibid, 1:71b;Ⅲ, p.188.
정치적 권력과 영향의 중심에 있었던 이 4, 5개월은 퇴계란 知的이나 정신적으로 그것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함정과 같은 것이라는 완전한 확신을 갖게해 주었다. 그는 관직에 봉사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儒道를 쫓는 사람이 미숙한 상태로 그것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었다. 관직을 탐내지 말라고 高峯에게한 퇴계의 충고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선비가 일단 朝廷에서 하나의 벼슬을 얻으면, 그는 낚시에 걸린 생선과 같게 된다. 그 성격이 强하고 직선적인 사람들은 한 당파의 우두머리가 되기를 도모한다. 弱한 사람들은 오로지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를 서로에게 가르칠 수 있을 따름이다.』
) Ibid, 1:74b;Ⅲ, p.189.
더우기 퇴계는 高峯에게 致仕의 예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일단 정치에 발을 디디고 난 다음에는 고상하게 물러설 방법이 없다고 경고한다. 게다가 자기처럼 병든 신하로서 사퇴를 청하려해도 어려운데, 高峯은 그러한 구실마저 없으니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Ibid., 74b∼75a;Ⅲ, p.189∼190.
퇴계의 老年의 위기에는 일종의 역설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유가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여러번 제공받았지만. 유학에 전념하기 위해서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사람들은 도대체 유학이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질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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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朱熹가 그와 유사한 기회를 부여받았다면, 그것을 수락하기를 거부하였겠는가? 朱熹는 죽기 조금전에도, 儒家의 儀體를 탐구하는 연구소를 설립할 것을 청원하였다. 그리고 그의 소망은 허락되지 않았다.
) 왕 마호흥(王懋 ), 朱子年譜, Ⅱ, 4:45b∼47a.
이와 대비해서 퇴계는 成均館 大司成으로 장기간 봉직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퇴계는 틀림없이 이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 朱熹의 편지를 통해 어떤 교훈으로 받았었을 것이다. 사실상 퇴계의 「朱子書節要」의 첫 부분은, 뜻을 세운 儒家의 선비가 관직에 나아갈 때와 방법에 대해서 논하는 「出處」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 朱子書節要, 1∼2, 李退溪全書, 2卷, 아베 요시로(토오쿄오:退溪學硏究 1975), I, pp.8∼47.
퇴계는 朱熹의 교훈이 뚜렷하고 명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 있었던 主된 관심은 『本原之地』의 함양에 있다는 것이다.
) 自省錄, 1:75b∼58a:退溪全書, Ⅲ, p.181.
政治的 책임감을 비롯한 기타의 고려 사항은 그 輕重에 따라 적절히 평가되어야 한다.
) 言行錄, 7:9b∼13b:退溪全書, Ⅵ, pp.127∼129.
퇴계는 老年의 위기를 자신의 모든 시간과 精力을 爲己之學에 돌림으로서 극복하였던 것이다. 1559年 「理學通錄」의 완성, 1560年 陶山書院의 설립, 수년간의 四七論辯 등은 동아시아의 유학사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전으로서,
) 투 웨이밍(杜維明), 『李退溪의 人性에 대한 認識;한국 性理學의 四七論에 대한 예비적 고찰』, 韓國性理學에 대한 學術會議, 美國 學者위원회와 예일 大學 주최, 레이크 코모, 이태리, 8月 3∼7日, 1981. 또한 서문상의 『李朝 韓國 儒家들의 궁극적 관심:理氣論 分析』을 보라. Occasional Papers on Korea, No.5.(ACLS. SSRC의 韓國學 共同委員會, 1977년 3월), pp.20∼66.
퇴계의 실존적 결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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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비록 정부의 요직과 관계를 끊을 굳은 결심은 하였지만, 그의 조정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은 높아만 갔다. 전형적 선생이라는 그의 위치가 그를 관직자 가운데서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들 비방하는 자들은 퇴계가 「戊午辭職疏」에서 戊午年(1543) 이래 자신이 여러 번에 걸쳐 사퇴를 허락하거나 또는 더 낮은 직책을 청원했었다는 것을 王에게 直疏하는 것을 보고 불쾌하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퇴계의 겸손때문에 그의 적들은 그에게 하등의 효과적 공격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우기, 퇴계의 겸손이란 것은, 그의 비방가들이 생각하듯이 단순히 허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퇴계의 인물됨의 결정적 특성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1558年 정치에 뛰어들었더라면, 퇴계는 아마도 成均館의 學制를 개편한다거나, 유망한 弟子를 양성한다거나 또는 관료제도에 이서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시킨다거나 또는 관료제도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혹장시킨다는 등의 일을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가 理學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계속하거나, 陶山書院을 설립하거나 또는 李朝에서 가장 탁월한 朱熹의 창조적 해석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해서, 퇴계는 동아시아의 大儒學者의 대열에 참여할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퇴계는 68세때인 1568年에 서울에 되돌아갔다. 그의 「戊辰大條疏」와 「聖學十圖」는 이때 젊은 왕으로 하여금 유학의 가르침의 근원을 깨닫게 할 목적으로 쓰여졌다. 그리고 이것들은 구후 300여년 동안 한국儒生들의 기본서가 되었다. 知的인 자기정의를 끊임없이 추구한 수년을 상징해 주는 퇴계의 「自省錄」은 그가 老年에 자신의 학문적 열정을 실현하고자 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출발은 가장 엄격한 학문과 敎人의 계획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퇴계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지은, 『眞城 李氏의 陶山으로 은퇴하여 여생을 숨어살다』
) 言行錄, 7:57a;退溪全書, Ⅵ, p.151.
하는 碑文은 우리에게 그가 고독 속에 무엇을 성취했는가를 웅변해 준다.
-216-
(이 재 희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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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02.04.26
  • 저작시기2002.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3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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