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경제관의 경제사적 의의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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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서 논 자본주의의 성립과의 관계
Ⅱ.우리나라 경제사의 연구동향과 Ⅳ.막스베버의 자본주의 정신과
식민지 사관 타파의 숙제 소태산의 경제관과의 관계
1.우리나라 경제사의 연구동향 1.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과
2.식민지 사관 타파의 숙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관
Ⅲ.소태산의 시대적 배경과 한국 2.자본주의 정신과 소태산
자본주의의 성립과의 관계 대종사의 경제관
1.소태산의 시대적 배경 Ⅴ.결 논
2.소태산의 시대적 배경과 한국

본문내용

에 대한 반성은 韓國文化史 硏究에서도 크게 대두되어 오늘의 韓國史硏究의 새로운 思潮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發展論的 視角에서의 接近方法에 대해 그 論理展開의 무리로 인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充足感을 채우기에는 그 說得力을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朝鮮朝 후기 商業이나 工業 또는 農業部門에 일어 났던 部分的인 歷史 발전 과정을 논구하여 그것으로 資本主義 성립을 유추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이렇다 할만한 劃期的인 史觀定立 없이 현재까지 넘어왔고 그러다 보니 植民地 史觀問題도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체 그저 그런 상태로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資本主義의 胎動問題에 관해서는 두가지 側面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自生力에 의한 資本主義에로의 능동적인 發展方向이 있었다고 보느냐,아니면 우리에게는 그런 能動的인 自生力이 없고 수동적으로 日本에 의해서 移植되었다고 보느냐 하는 견해이다.
이 중 두 번째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데서 나온 이른바 植民地史觀이다. 하지만 거의 一世紀를 통해서 많은 知識人들을 혼돈시켰고 이데올로기적 論爭으로 세계를 兩分시켰던 마르크스 經濟學은 최근 쏘련과 동구권의 많은 社會主義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市場經濟體制를 導入함으로서 그 이론적 패러다임은 이미 설 땅을 잃게되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韓國社會經濟史는 종래의 방법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資本主義萌芽에 관한 연구태도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또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여러 문제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農民의 分解라든가 매뉴팩처의 存立與否 등에서 資本主義의 萌芽를 찾으려고 하는 방법론이라든가 奴隸나 農奴및 계급의 대립 속에서 전통사회의 사회경제 실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방법론은 오늘의 韓國社會經濟史學의 한계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방법론에 입각하고 있는 한 韓國社會經濟史學은 一般史와 구별될 수 있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韓國社會經濟史硏究가 새로운 시대, 즉 開拓期의 史學을 극복하는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方法論的 革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 韓國社會經濟史가 당면한 긴급하고 당면한 또 중대한 課題라고 하겠다.
따라서 차제에 우리나라의 資本主義의 萌芽問題를 唯物論的 辯證法에서 탈피하여, 오히려 마르크스에게 影響을 주었던 헤겔의 觀念論的 歷史法則에 의해 조망해 보는 것은 큰 意味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視角에서 歷史의 運動法則을 규명함으로써 不名譽 스러운 植民地史觀 문제를 불식시킬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수천만겁을 이어갈 우리조선만대의 역사과정 속에서 어떤 民族的 自肯心을 세울 수 있을 것이 되기 때문이다.
植民地 史觀 不息問題는 경제사를 연구하는 經濟學者들이 풀어야 하는 歷史的 課題이다.그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少太山의 社會 經濟觀은 우리 나라 植民地 史觀 打破問題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少太山이 태어나서 자라신 시점이 舊韓末 日帝 初期로서 韓國 資本主義 成立의 起點과 時期的으로 맞고 소태산이 설하신 社會 經濟觀이 新學文의 접함이나 西洋文明의 영향과 전연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터득하신 大覺의 한 支流로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히 民族的 自覺에서 얻어진 民族의 숨은 얼과도 그 思想的 脈을 같이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朝鮮 後期의 實學者들과 구한 말의 開化派들에 의해 資本主義를 受容 할 수있는 精神的 社會基盤을 다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初期 經濟史를 硏究하는 經濟史學者들은 資本主義에로의 能動的인 發展方向을 거부하고 植民地 史觀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植民地 史觀이란 運命的으로 외국의 影響에 의해 資本主義가 도입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본다면 實學者들이나 開化派들의 思想的 根源마저도 중국이나 일본 또는 西洋의 影響을 받았을 것으로 賣渡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圓佛敎 大宗師의 經濟觀은 外國 影響을 전연 받지 않고 순전히 民族的 自覺에서 얻어졌다는데 그 經濟史的 意義가 있는 것이다.
대종사가 태어나시기 전 그 앞의 시대란 바로 500년 동안 이어온 李氏朝鮮이였다. 朝鮮이 日本에 의해 멸망하고 일제 36년을 거쳐 解放된 후 또다시 50년이 흐른 이 시점까지도 아직도 흰 두루마기에 갓쓰고 다니면서 儒學만이 至高의 學問이라고 믿고 약간의 宗敎性까지 부여하여 그것을 追從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이 마당에 그 당시 典型的인 양반의 피를 받고 자라왔으면서,新學問과도 별로 接할 機會도 없었고 또한 開化思想이 크게 번지고 있었던 평양이나 서울(京城)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전라도 땅 산간벽지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깨우쳐서 獨自的인 社會改革案을 내어 놓았다는 것은 民族間 自肯心을 내세울 수 있는 대단한 卓見임에 틀림 없는 것이다.
圓佛敎 大宗師의 社會經濟觀은 우리나라 資本主義 胎動단계에 있어서 깊은 意味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朝鮮朝 500년 동안 支配해 왔던 傳統價値體系 밑에서 전연 資本主義 胎動을 期待할 수 없는 不毛地帶에 외래의 文物이나 新學問의 影響없이 스스로 得道하여 얻어진, 순수한 民族的 自覺에서 나온 社會改革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그 당시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던 先覺들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품고 있던 未來의 社會改革案을 圓佛敎 大宗師의 가르침 속에 함축 요약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國民 大衆속에 저변확대 될때 資本主義는 외부의 影響없이 자연적으로 배태될 수 잇는 것이다. 正祖당시 천진암에서 이벽등에 의해 天主敎가 自生的으로 成長 전파되듯이 不毛地帶에 資本主義를 배태할 새로운 토양을 일궈낸 것이다. 씨가 배태할 토양이 형성되면 씨는 뿌려짐과 동시에 바로 발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歷史觀에 따라 歷史의 運動法則은 封建主義 다음에 必然的으로 資本主義로 연결된다면 그 당시 우리는 이미 배란기에 있는 성숙한 처녀 처럼 資本主義가 배태할 토양과 습기와 온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이 시점에서 外部에 의한 資本主義 도입 운운하는 것 자체가 논란의 가치가 없는 실없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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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2.05.22
  • 저작시기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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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4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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