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트 폰테인과 이사도라 덩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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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마고트 폰테인

2. 이사도라 덩컨

본문내용

그리하여 21세 때 그녀는 자신의 춤을 인정해 줄 곳을 찾아 미국을 떠났다. 그녀의 빈약한 저축을 털어서 온 가족이 함께 가축을 수송하는 보트를 타고 영국을 향해 출발했다. 이곳에서 그녀의 개혁정신은 머지 않아 보상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저명한 여배우였던 패트릭 켐프벨 부인의 후원으로 그녀는 런던의 사교계를 이끄는 귀부인들의 리셉션에 초대되어 춤추었는데 여기서 그녀의 춤을 본 사람들은 오로지 발레의 전통적인 형식에만 익숙해 있었는데 그만 넋이 빠져 버렸던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젊은 여성이 흡사 '숲속의 님프인 양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채 맨발로 춤춘다'는 진귀한 광경을 보려고 극장에나 콘서트 홀로 군중이 쇄도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덩컨은 사방에서 공연 초청을 받게 되는 성공을 마침내 누리게 되었다. 헝가리. 베를린, 파리 등…… 도처에서 군중은 그녀에게 미칠 듯이 열광하였다.
1905년 덩컨의 최초의 러시아 방문은 그곳 무용계에 선풍적인 논쟁의 씨를 뿌렸고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위시해서 러시아 발레계의 거성인 박스트나 포킨, 브노와, 파블로바 등의 열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근대 연극의 혁신자이며 당시 모스크바 극장 책임자였던 스타 니슬라프스키는 후에 덩컨의 이론을 대폭 받아들였으며 그의 자전 속에서 여러 번 덩컨과의 회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어쨌든 덩컨이 세계 무용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독일과 러시아 그리고 모국인 미국에 그녀 자신의 무용학교를 설립한 적은 있었으니 모두가 단명했고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계통적인 후계자는 마사 그래엄이나 마리 뷔그만 같은 위대한 근대 무용가를 위시해서 적든 많든 그녀의 영향을 받지 않은 근대 무용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적어도 계통적인 조직체로서는 어떤 '스쿨'도 남기지 못했음은 실로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덩컨은 그녀의 예술이 그랬던 것 못지않게 사생활 역시 헤드라인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의 첫 아이 다이드라는 위대한 여배우 엘렌 테리의 아들이며 탁월한 무대 미술가였던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서 난 딸인데, 크레이그는 결혼을 혐오하는 점에선 덩컨과 완전히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다. 이 비범한 천재 속에서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닮은 '자매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속에서 나의 살, 나의 피를 만났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남자는 인간이라기보다 그녀에겐 차라리 '블레이크의 천사'인 양 느껴졌다. 그와의 사랑은 '한 남자와 한여자와의 사랑이라기보다 쌍둥이 영혼의 결합'이었으며, 그리하여 '지상적인 열정은 백열하는 천상의 불꽃으로 전환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사도라 덩컨은 평생에 걸쳐 수없이 사랑을 했지만 매번의 사랑은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거의 언제나 이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고든 크레이그만큼 그녀를 최고도의 높이에까지 상승시켜 준 사람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그녀는 이 위대한 혼 속에서 온갖 최고의 것을 모두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아이 패트릭은 재봉틀 재벌의 상속자이며 저명한 예술 후원자인 파리스 싱거와의 사랑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이 두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놀랄 만한 예술가적 천분을 드러냈는데 덩컨은 이 두 꼬마 천재에게 장래의 무용을 전수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1913년 유모와 함께 타고 가던 가동차가 세느 강에 빠져 모두 죽어 버렸다. 이때의 충격은 덩컨을 회복할 수 없는 절망 속으로 몰아넣어 그녀는 여러 번 자살 결행 직전까지 이르곤 했었다. 이때가 덩컨의 생애에서 최대의 위기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이 비극이 훨씬 이전에 왔던들 나는 그걸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순간 내 생명의 전힘과 에너지가 최고로 팽창돼 있었으므로 이 슬픔은 나의 힘과 기력을 깡그리 분쇄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1920년(42세) 모스크바에서 그녀의 무용학교를 설립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어 그녀는 드디어 필생의 꿈이 실현되는 기회가 왔다고 믿고 미련없이 미국을 떠났다. 그녀 특유의 혁명적 기질을 가지고 덩컨은 누구에겐가 말했었다. 러시아야말로 약속된 땅이라고. "나는 내 운명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라고 그녀는 선언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만났다. 2년 후 자기보다 15년이나 연하인 시인 세르게이 안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1922년에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그녀의 맹세를 깨뜨리면서까지 결혼을 한 것은 미국으로 그와 동행하기 위한 불가피한 법적 조치였다.)
그러나 예세닌을 동반하고 미국에 간 덩컨을 모국에선 환영하지 않았다. 조국은 이들을 볼셰비키의 앞잡이로 취급했고 덩컨이 공연하는 극장에서 예세닌을 관중에게 소개했을 때 장내는 야유와 고함으로 수라장이 되었다. 관중들에게 분격에 찬 연설을 하고 나서 그녀는 기자들에게 선언했다. "안녕히, 미국이여…… 나는 다시는 결단코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어요." 실제로 그녀는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후 둘은 유렵에 갔으나 예세닌은 노이로제가 심해져 이사도라 덩컨을 떠나 소비에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1925년 마침내 그는 권총자살을 함으로써 젊은 생을 끝장내 버렸다.
그녀는 만년의 수 년간을 퍽이나 비탄에 젖어 프랑스의 니스에서 불안정한 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그녀의 긴 스카프가 자동차 바퀴에 감기는 바람에 목뼈가 부러져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붉은 스카프로 목이 졸리운 채. 1927년 9월 14일, 그녀의 나이 49세였다.
"나는 사랑과 예술 어느 쪽을 더 우위에 두는가를 종종 자문해 보지만 도저히 이 둘을 분리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술가만이 오로지 사랑하는 자일 수 있으며 오로지 그만이 아름다움의 순수한 비전을 지녔지 때문에. 그리고 사랑은 불멸의 아름다움 위에 머물 것이 허용됐을 때 그것은 바로 영혼의 비전이 되는 것이므로" 이같은 그녀의 고백처럼 덩컨은 과연 사랑과 예술이 혼연일체가 된 최고로 아름다운 삶을 유감없이 구연했으며, 그리하여 그녀 뒤에 오는 인류에게 죽음을 넘어선 '불멸의 아름다움'을 사라지지 않는 빛처럼 남기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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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6.07
  • 저작시기2002.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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