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 개화사상,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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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화파의 형성

2- 임오군란

3- 제물포 조약

4- 수호조약 속약

본문내용

979년, 허종호 오길보 김영숙 이종현, [조선에 있어서의 부르주아혁명운동]
이들에서는 우선 갑신정변을 1884년 부르주아혁명으로 표현하고 있는 가운데, {김옥균}에 대해 크게 두가지 점에서 비판하였다. 첫째 이 책이 역사발전에서의 개인의역할, 구체적으로는 부르주아혁명운동에서의 김옥균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에 따라 역사연구에 기본이 되는 사회발전의 합법칙성과 인민대중의 혁명적 역할을 추구하는 데 지장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갑신정변을 부르주아혁명이 아닌 부르주아개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비판되었다. 개화파는 부르주아적이고 애국적인 과제를 해결해내기 위한 주권의 문제를 봉건통치자와의 타협이 아닌 폭력적 방법, 즉 무장정변으로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3. 일본
1) 山邊健太郞, [조선의 개혁운동과 김옥균-갑신정변과 관련하여](1960)
이나영의 {조선민족해방투쟁사}를 비판함. {갑신일록}의 신빙성도 비판. -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의 존재를 불인정.
갑신정변의 내재적 계기를 부인, 외재적 원인을 강조.
ぢ갑신정변의 遠因은 조선의 궁정내에서 민씨일파와 반대파의 암투에 있었다. 이 양자의 암투에서 민씨 일족이 청국과 연결되고 반대파가 일본과 연결된 것이다.っ
ぢ갑신정변은 조선 내부의 원인보다도 외부로부터의 원인으로 일어났다. 조선에 대한 외부 2대 세력이 조선의 궁정에 반영되어 궁정내에 사대, 친일의 양파가 생기고, 이 양파의 싸움이 사변의 원인이 된 것이다.っ
ぢ김옥균 등이 쿠데타를 할 때 모범으로 한 일본에는 의회는커녕, 내각제도조차 행해지짖 않았고, 헌법제정을 앞에 두고 관료제도를 강화하고 있었다.. --- 김옥균이 본 일본은 위로 전제군주를 모시고 태정관제를 가진 이른바 반봉건적 국가였다.っ
ぢ갑신정변은 정치개혁으로서 의의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 봉건적 신분제의 폐지조항이 없다(で폐지문벌 운운と 조항은 で문벌폐지と의 뜻일뿐 で인민평등권 제정と의 조항은 아니다.) 토지개혁의 요구도 없다.
ぢ갑신정변의 정치개혁의 요구는 2-3개의 관서의 폐지, 재정관계는 모두 호조의 관할로 한다는 정도의 것으로 부르주아적 개혁의 요소는 하나도 없다. 이 정도 개혀이라면 일본의 덕천막부에서도 하고 있었다.っ
ぢ김옥균 일파가 갑신정변에서 한 역할은 개명적 정신에 의한 행동보다도 일본의 앞잡이로서 행동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개화파라 부르지 않는다.っ
2) 梶村秀樹, [조선근대사와 김옥균 평가] (1966)
두북한의 {김옥균}에 대한 평 -- 외인론, 정체론, 특수사회론, 사대주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ぢ김옥균이 일본의 명치유신의 경험을 본보기로 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교조주의적으로 조선에 적용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부르주아 개혁운동의 선구엿음을 확실하다. 그러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일본의 후쿠자와 등에 경도되고 일본정부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끌어들이려 했던 김옥균이 일본에 대해 충분히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ぢ국내의 사회적 기반과의 관련은 {김옥균}에서도 명확히 되어 있지 않다. 김옥균 일파는 내재적 발전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그것과 바로 직결되지 않고 오히려 지식인적인 관념적 계기가 강했다고 보여진다.っ
외인론 극복과 민족주체적 관점에 대하여 -- ぢ세계자본주의 형성과정, 즉 근대사에서는 아떠한 일국의 역사도 단절적, 고립적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국사의 내부모순의 전화과정이 주된 동인이긴 하나 이미 이 시기에는 일국사 자체가 세계사 전체에 깊이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국사가 소위 왜곡당하면서 진행되는 것을 배제한 순수하고 추상적인 일국사의 내재적 발전과정이란 있을 수 없다.っ
3) 안병태, {조선근대경제사연구} (1975)
4) 강재언, {조선의 개화사상} (1980)
{김옥균}의 시각과 대동소이. 다만 김옥균의 영웅시에는 반대.
내재적 시각 위주, 부르주아개혁의 선구로서 파악.
국제적 조건의 분석은 결여.
5) 原田環, [일본에 있어서의 갑신정변 연구] (1985)
북한의 {김옥균}의 방법론은 일국사적 견지에서 한국사의 내재성을 명확히 하려 했던 것이나, 국제적 제조건을 과소평가하여 사상시킨 결함이 있다.
1870-80년대의 한국의 과제는 구래의 사대교린체제의 구조하에서 어떻게 독립과 근대화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었고, 이 독립과 근대화를 가리키는 말로서 で개화と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 국제적 조건을 시야에 넣으면서 갑신정변의 의의를 평가해야 한다.
4. 남한
1) 이광린, {개화당연구} (1973)
갑신정변은 자주적 사상에 기반을 둔 근대민족주의의 선구적 운동.
그 취지나 이상이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지지를 받지 못한 처지에 외세에 의존하여 거사하였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한국사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올바로 제시되었다.
2) 신용하, {한국근대사와 사회변동} (1980)
세계사적으로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사회의 자주독립과 사회발전을 추진하려고 한 자주근대화 운동
혁명의 기저세력으로서 시민계층의 성숙을 기다리기에는 머무나 시간이 촉박하여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감행해야 할 상황이었다.
3) 김영작, [초기 개화파의 민족주의사상과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1984)
사상적 동인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결과 영향은 부정적이었다는 견해.
영향 -- 청세력의 보다 강력한 부식, 진보적 사상의 맥이 단절되었던 점.
4) 주진오, [개화파의 성립과정과 정치사상적 동향] (1993)
두개화파가 정변을 구상한 것은 1883년 5월에서 1884년 4월, 즉 김옥균이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에 체류하던 시절이었다. 김옥균이 고토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자주독립을 달성하고 민씨 척족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で국왕의 밀칙と을 얻어 평화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첫번째 방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일본인을 고용하여 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들면서 고토의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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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8.06
  • 저작시기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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