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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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오군란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언(序言)

2. 「임오군란」의 성격규정

3.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4. 「임오군란」의 사회적 의미
1) 하층민의 존재양식과 하급 군병의 성격
2) 저항 운동으로서의 임오군란의 구조

5. 「임오군란」의 결과와 영향분석
1) 임오군란과 도시 빈민들
2) 임오군란과 대원군
3) 임오군란과 민씨정권

6. 결어(結語)

본문내용

다는 한계도 있다. 결국 사건이 진행되면서 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대원군 세력과 민씨정권과의 정권투쟁의 양상을 보이면서 정변으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정리하자면 정변으로 변질되기는 하였으나 임오군란은 적어도 민중들이 자신의 힘에 의해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경험과 믿음을 갖게 했다. 하지만 이념적인 기반을 갖춘 정치조직이 없이는 정권을 잡기 힘들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줌으로서 후에 일어나는 동학농민운동과는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2) 임오군란과 대원군
대원군의 입장에서 볼 때, 임오군란을 통해 정권 장악의 기회가 온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대원군은 밀려난 이후 계속해서 재집권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자신의 재집권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낙과하고 있었다. 이는 1881년 보수 유생 세력의 상소 운동의 열기가 한찬 솟아오르던 상황에서 이들과 힘을 합쳐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쿠테타 시도에서도 표출되었다.
하지만 결국 대원군이 청으로 납치되면서 척사 세력은 철저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정현덕, 조병창, 조우희, 이회정, 조채하, 이재만, 이원진, 강범수 등은 대원군파로 지목되어 처형당하였고 일본의 요구와 고종의 명령에 의해 척화비는 모두 철거되었다.
2차 집정 기간 동안 대원군은 반개화 정책, 민생 안정 정책, 친청반일 외교정책 등을 계획했지만 이는 봉건 체제 내에서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33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실효를 거두었는지 의문이 든다. 대원군이 이 기간에 폈던 정책들은 다만 구의 정책 지향을 알 수 있는 지표로의 역할을 할 뿐이다.
3) 임오군란과 민씨정권
대원군파의 몰락은 곧 민씨정권의 부활을 의미하였다. 정부는 7월 25일 명성황후의 생존을 공포하고 국상으로 위한 삼도감을 철폐시키고 왕비봉영절의를 결정하였으며, 명성황후는 8월 1일 충주 장호원에서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하지만 민씨정권은 군란을 자책하고 ‘國利民禮’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적에 대한 숙청만을 일삼았다. 또한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하여 청군을 이용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청국에 대한 의뢰는 더욱 높아졌으며 그 결과 청국에 종속화 되는 경향이 짙게 나타났다.
한편 여기에 더하여 소장 개화파 관료들은 청으로부터 독립하여 내정과 외교를 혁신하고자 주장하여 守舊派와의 암투가 전개되었으며 이것은 2년 후 ‘갑신정변’으로 표면화되었다 할 수 있다. 결국 임오군란으로 조선은 국력만 소모되었으며 자주성마저 상실케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6. 결어(結語)
이상에서 임오군란에 대한 성격규정 문제에서부터 전개과정, 사회적 의미, 각 정치세력들에게 미친 결과와 영향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동안 정치외교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온 것은 「임오군란」이라는 사회 운동 자체보다도 「임오군란」 때문에 발생한 동북아 정치 상황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온 동아패권주의의 전통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외교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내적인 모순을 안고 갈등을 빚던 조선사회가 개항 직후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던 과정에서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민중 저항 운동이었다는 사회운동적 측면에서의 분석에도 주목해야 하며, 중요한 것은 이들 둘의 결합을 통해 임오군란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참고문헌
조성윤, 「임오군란의 사회적 성격」,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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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일, 「임오군란은 군란인가 정변인가」. 『한국근현대사』, 1992.
이민원, 「임오군란은 왜 일어났는가」, 『한국근현대사』, 1992
권석봉, 「임오군란에 있어서 청국의 개입은 정당한 것이었는가」, 『한국근현대사』, 1992.
김상기, 「임오군란은 어떻게 마무리지어졌는가」, 『한국근현대사』, 1992.
조항래, 「임오군란은 일본의 한국침략에 어떠한 작용을 하였는가」, 『한국근현대사』, 1992.
김동원, 「임오군란 연구」. 『국사관논총』44, 1993.
조성윤, 「‘임오군란’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사론』25. 국사편찬위원회, 1995.
김정기, 「임오 ‘군란’ 원인론의 검토」, 『인문과학연구』5, 서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6.
류재택, 「임오군란의 원인에 대한 재고찰」, 『실학사상연구』14 (정명호박사정년기념호), 무악실학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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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4.06.05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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