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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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기독교 선교 역사에 대한 카이로스적 이해
2.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종교신학적 이해
3. 종교신학적 선교이해
4.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즘`을 향하여

본문내용

의 행동의 신비를 존중한다. 신비 없는 선교는 억압적이다. 그 신비에 민감한 것은 우리의 선포를 덜 불안하게 하고(영혼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나에게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므로) 덜 공격적이게 할 것이다(나는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제쳐두고 단순히 과실이나 죄와 마주치지 않으므로)"
또한 양자간의 상호 유기적 관계를 넘어서서 선포는 대화적으로, 대화는 선포적으로 해야 한다. 즉 대화적 선포와 선포적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적 선포: 예수의 삶에 대한 기독교의 선포가 종교들 사이에서조차 유의미하려면 이웃종교들에게도 해석, 이해 가능한 방법과 형태로 선포되어야 한다. 일방적 언어의 투여가 아니라 대화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해야 한다. 복음의 선포내용이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그것이 이웃종교들에게 조차 가치 있는 선포가 되기 위해서 그 선포는 필수적으로 '대화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대화적'이라는 표현은 상호침투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대화적 선포"는 나의 선포(증언)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을 방지한다. 그것은 선포의 내용이 이미 대화 상대자 안에서도 이미 일어난, 혹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그래서 이해 가능한- 내용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하나님의 신비를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포는 선포하는 자의 행동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선포를 받는 자와의 상호교류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대화적 선포는 대화를 통해 내가 선포한 내용에 나의 체험의 변화를 상정한다. 그것은 체험의 질적인 변종(變種)이 아니라 체험에 대한 성숙을 의미한다. 즉 선포의 내용 그 자체는 변화 또는 변질 될 수 없지만 그 선포에 대한 원체험의 깊이와 넓이는 얼마든지 심화, 확장될 수 있다. 대화적 선포는 상대방에게 그리스도의 신비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하편, 자신 스스로도 그것을 재체험 할 수 있게 한다. 만약 대화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선포라면 아무리 확신에 차 있더라도 독백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대화적 선포는 일방적인 베풂이 아니라 상호 배움이다. 대화적이지 못한 일방적 선포는 결국 선포되지 않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선포적 대화: 종교간의 대화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는 사람들은 종교간의 대화가 자기 신앙을 약화시킨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개방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신앙을 '괄호넣기'(현상학적 판단중지)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잠시 괄호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필요하지도 않다. 이러한 잘못된 선입견과 불필요한 괄호넣기의 입장을 벗어나서 선교로서 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선포적 대화이다. 우선 종교간의 대화의 가장 큰 장애물은 이웃종교에 대한 배타성 이전에 자신의 신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불충분하다는데 있다. 종교간의 대화는 단순한 의견 교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대화의 내용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해야 한다. 자기 신앙에 대한 자기이해 없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간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종교간의 대화는 선포적인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자신의 종교 안에서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실제적으로 선포적 대화는 불가능하다.
4.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즘"을 향하여
지금까지 필자는 21세기 기독교의 선교의 내용을 고찰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파라다임의 변화에 대한 소견을 밝혔다. 삼위일체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상호 창조사역의 선교가 각 해방과 복음의 토착화와 종교 상호간이라는 선교영역으로 발전해나가야 함을 피력했다. 이것을 위해 신학적 토대는 어느 하나 약화됨 없이 성숙되어 가야 할 것이다. 이것을 다음의 표에 담아 보았다.
삼위일체적 활동
아버지
아들

선교의 세 영역
해방활동으로서의 선교
토착화로서의 선교
종교간의 대화로서의 선교
신학적 토대
민중신학
문화신학
종교신학
위 도표는 선교의 내용과 특징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표현된 것이지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실제 선교의 영역에서 이 세 가지는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상호 교류되고 영향을 미쳐야 한다. 21세기에도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선교활동은 계속될 것이며 이를 위해 선교의 보다 광범위한 깊은 이해가 창출되어야 할 것이다.
종교신학적으로 볼 때 선교란 우주적인 구원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며, 이를 위한 종교간의 대화는 선교의 본질적인 차원이다. 기독교가 종교간의 대화를 선교라고 봐야 될 이유는 한편에서는 기독교의 진리를 통해 이웃종교나 문화 속에 있는 진리 또한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확신하는데 있고, 또한 그 역으로 대화를 통해 이웃종교가 보여주는 진정한 영적인 가치와 영성으로 기독교도 자극과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선교가 개종을 목표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호헨딕이 "샬롬"을 하나님 선교와 연결시켜 사회 해방적 의미를 도출했듯이 우리는 종교들 사이에서의 샬롬의 실현을 '하나님 나라의 현실'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신학이 갖는 선교에 대한 적극적 의미가 획득된다.
21세기를 맞는 인류는 그토록 희망적이지 못하다. 각종 문명의 이기들이 발전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꿈꾸지만 한편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그 전쟁의 뿌리는 종교들간의 오랜 불신과 분쟁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전쟁, 문화갈등은 더욱 더 증폭될 때에 기독교 선교가 종교간의 대화와 평화확립에 기여할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선교는 없을 것이다. 우선 기독교 스스로 안고 있는 이런 분쟁의 씨앗과 열매를 적극적으로 제거한다면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 분명하다. 이를 위해 세계기독교 교회의 일치를 부르짖는 기독교내 에큐메니칼 운동을 넘어서서 종교간의 화해와 일치를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즘(Ecumenical Ecumenism)"으로 발전해야 나가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기독교의 에큐메니즘의 의의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이 옛 기독교 내부의 상처를 봉합하는데 그쳐서는 안되며, 세계종교가 다양한 목소리로 대화하면서 진리와 평화를 추구해 가는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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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2.10.05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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