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윤리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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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최근 독어로 출판된 신약성서윤리에 대한 총괄서술들

본문내용

시키려는 노력은 슈낙켄부르크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에 의해 받아들여진 "양심"이란 용어 설명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이성을 "신앙적인 이성"(glaubige Vernunft)으로 묘사한다(Ⅱ, 271). 이런 통합적 이해를 바탕으로 슈낙켄부르크는 이성적 윤리와 성서윤리를 연결하는 다리를 놓으려 하였다. 로제는 신약성서윤리를 종결된 체계가 아닌 "계속적인 수정"(standige Korrektur)으로 이해하면서(61), 기독교인의 양심을 "믿음에서 나오는 타인을 위한 섬김으로 인식하는 책임의식"(62)이라고 말한다.
양심 주제는 이성과 윤리, 자율적 윤리와 신율적 윤리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중심이다. "양심"(suneivdhsi")이란 단어는 구약(70인역)의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으며 주전 1세기경에 헬라 세계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양심" 용어 그 자체는 중립적인 용어이나, 바울의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요구를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윤리적인 결정을 내릴 때 그가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함께 알고 있는 것'(Mitwissen)이 그 자신을 책임 안으로 밀어 넣는다(고전 8-10장). 이러한 책임의 관점에서 신약성서의 권고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아래 놓여 있다. 이 자유는 결코 자율적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믿음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자유이다(F. Hahn). 바울에 있어서 자유는 기독론적으로, 종말론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롬 8:21).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부터 선물 받은 자유(갈 5:1)는 사랑 안에 머물며 또한 사랑 안에서 증명된다. 사랑은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해 있기 때문에(갈 5:23) 바울의 윤리는 "영의 윤리" (Geistethik)이며 "사랑의 윤리"(Agape-Ethik)로 규정되어야 한다. '양심' 내지는 '양심의 결정'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제한되며(고전 8-10), 그때 통전적 인간의 관점에서 이성과 육성를 나누는 것은 옳게 인정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인간론과 윤리의 관계가 계속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3.7 교회와 사회
끝으로, 신약성서윤리 서술의 과제가 신약성서윤리 진술을 성찰함으로써 신약성서의 에토스를 현실로 중개하는 것이라면, 또 신약성서윤리가 공동체 윤리이며 "비밀집회 윤리"(Konventikelethik)가 아니라면, 필연적으로 교회와 사회의 관계 설정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신약성서의 교회 이해와 세상 이해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슐츠는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에서 공동체의 지나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사회 윤리 대신 어떤 비밀집회 윤리가 나타난다고 성급하게 판단한다. 마르크센의 경우 실존신학의 관점에서 어떤 공동체 윤리도 찾아볼 수 없다. 마르크센에 의하면 교회는 어떤 정적이고, 가시적이고, 사회학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실존함이 "일어나는"(265) 역동적이고 불가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슐츠와 마르크센을 제외한 그 이외의 신약성서윤리 총괄서술의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신약성서윤리는 "공동체 윤리"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지 "도덕적 인식의 원천지"일 뿐 아니라 신약성서윤리의 "운반자"이며 "주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유래하지 않았지만 세상 한가운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슈낙켄부르크처럼 교회를 "사회적인 기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와 교회의 선포 과제와 단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데 있다. 여기서 '진정한 교회의 표지'(notae verae ecclesiae)의 문제가 제기된다. 오늘의 교회가 올바르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와 함께 현존하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보편적이고도 자비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을 위한 섬김에서, 특히 가난한 자, 약한 자, 억압 받는 자를 위한 섬김에서, 충분하게 실천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한 물음에 답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의 증거(고전 8:6; 히 1:1-4; 골 1:15ff.; 요 1:1-18)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구원자'(Erloser)일 뿐 아니라 '창조 중재자'(Schopfungsmittler)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랑은 단지 교회의 영역에만 국한될 수 없다. 기독교 윤리는 신약성서윤리에서 출발하지만, 그 시선은 보편적으로 세상(kovsmo")을 향해야 하며 그 시야는 온 세상을 포함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광활한 기독교 윤리 실천의 장(場)이며 "도덕적인 과제가 부과된 영역"이다. 세상 안에 있는 모든 모순들이 마지막 때에 비로소 제거되겠지만, 현존하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있는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4. 맺는 말
한국 개신교회는 이제 선교 2세기를 맞이하였다. 돌이켜 볼 때 한국 개신교회는 주변의 국가들에 비해 놀랄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런 한국 교회 성장의 이면에는 세계 선교 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교회 분열이라는 어두운 면이 자리잡고 있다. 급속한 교회 성장과 교회 분열의 긴장 속에서 최근 한국 개신교회의 성장이 둔화되고 혹자는 이것을 깊이 우려한다. 교회 분열, 교회의 집단 이기주의, 교회의 비도덕성, 교회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 교회의 세속화, 교회와 사회의 올바른 관계 부재(不在) 등은 분명히 한국 개신교회의 성장 정체 또는 마이너스 성장 요인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존립마저 위협한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한국 교회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 안에 신약성서윤리와 기독교윤리의 이론 정립과 함께 기독교적인 사회윤리에 대한 신학적 해명과 실천이 시급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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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2.10.12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6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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