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六經: Hexateuch, 창세기→여호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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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 이스라엘의 주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역대기 사가가 강조하는 역사신학은 첫째는, 북왕국은 토라에 불성실한 왕국이었고 남왕국 유다는 참이스라엘의 합법적인 계승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데 목적을 두었다.(다윗 왕조 선택사상!) 여기서 '응보사상'이 나오는데 이것은 신명기 역사보다 한층 더 발전된 해석의 단계로서 야훼의 계명을 준수한 남왕국 왕들은 복을 받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벌을 받는다는 해석이다.
둘째는,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 포로 후기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라는 데에 촛점을 두었다.
셋째, 예루살렘 제의 중심의 신정정치를 열망한다. 특히, 종교적 유대를 결속시키기 위해 "성전 제의 중심사상" 을 역사해석의 관건으로 삼았다.
역대기 사가는 새로 지은 제 2의 성전 공동체에 모든 희망을 걸고 이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역사, 신명통치의 역사를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 꿈꾸면서 역사를 전개하였다.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가 소망이 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 그리고 다윗을 이상화시켰다. 그리고 역대기 역사가는 이 두 왕이 세운 성전은 무너졌지만, 이런 과거 전승을 바탕으로 포로 귀환 공동체를 통한 신정체제의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었던 것이다. 실로, "어떻게 하면 야훼 종교의 전승을 올바르게 이어갈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명이 역대기 사가가 풀어야 될 그 시대 최대 당면 과제였다 하겠다.
2.3. 각 역사가의 사관 비판
신명기 사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관적 역사 해석
신명기 사가(史家)가 북왕국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은, 신명기 역사가의 사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역사적인 해석에 대한 방법상의 문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명기 사가는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역사였기 때문에 북쪽 이야기는 처음부터 편견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쪽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는 금송아지 제의를 수립한 야훼 혼합 종교 지지자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명기 사가는 사울(B.C. 1020-1000)을 북왕국의 첫 임금으로 부상시키며, 처음부터 편견적으로 묘사했다. 이와는 반대로 신명기 역사가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제의 단일화"의 원칙에 입각하여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행사를 치룬 히스기야(B.C. 715-687, 남유다)와 요시야(B.C. 640-609, 남유다) 왕만이 좋은 임금이라고 평가하였다.
또, 신명기 사가의 이런 편파적인 역사 해석에 희생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북왕국의 오므리(B.C. 876-869, 북이스라엘)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오므리는 남왕국의 다윗과 맞먹는 훌륭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명기 역사가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신명기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스라엘과 유다 왕조를 매우 주관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와는 거리가 먼 해석을 하였다.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군사력이 약하거나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지 아니하고, 경제가 파탄되거나 도덕이 타락하는 등 여러가지 구체적인 여건이 있어서 그리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기 사가는 북왕국 멸망에 대해서 매우 색안경을 끼고 평가를 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신명기 사가의 역사를 해석하는 사관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던질 수 있다 하겠다.
역대기 사관:
역대기 역사가는 신명기 역사가와는 다르게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을 하늘같이 떠받들어 올린다. 또한 역대기 사가는 신명기 사가가 북이스라엘 왕을 저주하면서도 그들의 치적을 남왕국의 것과 비교하면서 전개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역대기 사가는 신명기 사가와는 다른 어떤 뚜렷한 역사 의식 또는 역사 철학이 서 있어서 그것에 준해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데 주력 하였지만, 신명기 사가의 역사해석 방법에서 지적된 대로 역사적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에는 등한히 하였다고 보여진다.
이상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신명기 역사와 역대기 역사라는 것은 보편적인 역사를 토대로 한 것이긴 하지만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는 신앙고백의 차원에서 그치고 마는 매우 주관적인 역사 해석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가 대폭적으로 희생되는 역사 해석의 한계가 여전히 남아있다 하겠다.
참고자료 : 이스라엘 역사 중요 연대표
B. C. 1800년 아브라함.
B. C. 1250년 출애굽.
B. C. 1220년 여호수아의 가나안 점령.
B. C. 1125년 드보라와 바락의 승리.
B. C. 1050년 블레셋의 실로 파괴.
B. C. 1000년 다윗이 여부스 족에게서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B. C. 930년 여로보암 Ⅰ세의 반란 ; 왕국의 분열.
B. C. 875년 오므리에 의한 사마리아 건설.
B. C. 850년 엘리야.
B. C. 740년 이사야 소명 ; 앗수르 제국의 세력 확장.
B. C. 721년 사마리아 함락 ; 북왕국 멸망.
B. C. 701년 산헤립의 유다 침입.
B. C. 621년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과 '법전' (신명기) 발견.
B. 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파괴됨.
B. C. 609년 바로 느고와 전투 중 므깃도에서 요시야 왕의 전사.
B. C. 598년 바빌로니아의 첫 번째 유대 침략.
B. C. 587년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
B. C. 581년 바빌로니아로 세 번째 포로.
B. C. 538년 고레스(550-530)의 칙령과 포로민의 첫 귀환.
B. C. 520년 학개와 스가랴의 활동.
B. C. 515년 2차 성전이 준공됨.
B. C. 445년 예루살렘으로의 느헤미야 첫 번째 파송.
B. C. 400년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법전을 가져오다.
B. C. 332년 알렉산더 대왕,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다.
B. C. 198년 유대, 셀류커스의 지배로 흡수되다.
B. C. 167년 마카비 전쟁 발발.
B. C. 164년 성전 제사의 회복.
B. C. 142년 셀류커스 지배 끝남 ; 시몬, 제사장이 됨.
B. C. 128년 요한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정복하다.
B. C.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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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24
  • 저작시기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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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08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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