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뚜로 가는 일본인`을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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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읽게된동기)
2.본론(주된내용과 느낌)
3.결론

본문내용

최초의 인물이 될 것이다.
'추한 한국인'의 글속에 배어있는 오늘날을 조명하려는 시각을 강요하는 대목들이 숱하게 포진되어 있다.
'일본의 교만 한국의 오만'은 '추한 한국인'과 비교할때,그 단수를 한 단계 높인 교묘한 작품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 책은 한일 양국이 스스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자성하는 듯한 기법을 차용함으로써 제법 설득력을 띨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나 그것은 책의 제목에 국한되어 있는 일이고,내용에 들어가면 결코 일본의 자성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에 관한 기술도 오선화의 국적을 의심해도 좋을만치,종래 일본인들의 자기주장을 벗어나지 못한, 결국 일본의 교만과는 다른 일본의 당위성만을 억척스럽게 주장하는 내용들을 담고있을 뿐이다.
'치마바람'에서 오선화는(박태혁과 마찬가지로 의심이 들기는 마찬가지다.)'한사람 한사람에게 힘이 없음을 가르치는 일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는 10개의 단어를 외우는 학생이 8개의 단어를 외우는 사람보다 훌륭한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집단이 다섯을 익히기 위해 노력한다.
'애매함'을 거론한다면 매사에 확실함없이 분명함을 지적하는 일일 것이다.그런데 애매함이 일본을 부강시켰다는 논리는 어떻게 해낼 수 있는 발상인가?이것이 바로 오선화의 한계이고,'치마바람'의 주류를 이루는 맥락이다.
단체를 소중히 여기는 집단사고 중심의 교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어떠한 제도든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유독 한국관련 부분에서 약점과 치부를 찾아내 그것이 일부이건 또는 특수 요건에서 벌어진 한계상황이건 뭉뚱그려 한국인 전체의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 글, 이것이 바로 '치마바람'의 전모이다. 와타나베가 기술하는 한국인의 대일관에는 공감을 표할 수 없다.
『한국인의 교육은 반일 교육이다.따라서 교육을 적게 받은 사람들은 일본을 좋아하나,교육 수준이 높으면 교육의 효과로 일본의 단점을 교양받게 된다.한국의 반일은 일제시대의 반미와 유사하다.』
와타나베의 말을 다시 요약해 보면,식민조선을 체험했던 세대들은 일본을 경험한 터여서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는 반면,40대 이하의 이른바 한글 세대는 일본에 대한 정보 부족과 반일교육의 영향으로 반일성향이 짙으며,여기에서 특기할 일은 교육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반일의식이 높다고 하는 말인데, 과연 이것이 가능이나 한 이야기인가?사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이렇게 한국인과 한국을 매도하고 왜곡하는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겐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요즘이 어떤 시대인대...
이런 일본인이 있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해 얕잡아 보고, 이상한 눈으로 보는 다수의 일본인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그런 사람들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무슨 이유로 그래야만 하는지 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중간 중간 참을 수 없는 화가 솟아오르기도 했지만 감정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뭔가 분명히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선화와 와타나베, 두 사람은 우리들을 향해, 한글에는 여운이 없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들이 과연 여운의 의미나 제대로 알고 있는 지 모를 일이다.『한자는 복잡한 개념을 교묘하게 사용하는 표현이 가능하다.그러나 한글은 직접적인 표현을 하기 때문에 여운을 남기거나, 여운있는 표현을 하기 어렵다.』
이들이 과연 한글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한글을 해득할 수 있는 사람의 표현으로는 보기 어렵다.
한글에서, 한국인이 대화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상사를 높이는 일은 어법의 정확한 사용여부를 떠나서 자신이 상사를 존경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이것이야말로 외형적으로 상대를 높이면서 속으로는 전혀 다를 마음을 먹고있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이점이다.
일본인들은 36년의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한국인들이 못마땅한 듯 싶다. 그들은 당시 조선의 피폐상을 거론하며, 일본의 조선 합병은 서세동점하는 열강들의 각축속에서 일본이 선택한 최선의 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일본의 조선통치로 하여 유교사회의 병폐인 반상의 차별이 해소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화된 평등교육을 실천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음은 물론, 농촌진흥, 식산, 철도, 항만 등의 건설에 힘쓴 결과, 조선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성실한 교사, 경찰들은 조선인의 존경을 한 몽에 받아, 당시 일본을 싫어한 것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뿐이었다고 단정해 놓고, 조선인들이 치욕으로 생각한, 창씨개명조차도 조선인들의 희망을 허가한 듯한 변설을 늘어놓고 있다.
가세, 와타나베 두 사람이 제시하는 조선인들과 친숙했던 일본인들은 우리에게 놀라움 이상의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교사들;군인, 경찰, 지주 등을 거명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일제시대에 최고 악역을 담당했다고 믿어지는 그들은 역으로 지선의 인물들로 그리고 있는데, 살펴보면 마을의 순사부장과 순사는 동네의 결혼식, 장례를 등에 초치되어 마을 사람들을 축하, 위로해 주었다. 따라서 그들은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일제치하여서 그들은 사실상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도 되지않는 허무맹랑한글을 쓴 가세, 와타나베, 알수 없는 여자(?) 오선화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악행에 대한 반성 기술은 초보적인 수준에도 접근하지 못하면서, 일제가 이땅에서 저지른 숱한 만행들은 모두 은닉한 채, 기껏 반성의 빛을 보인다는 것이 있지도 않은 사실들을 일부러 조작해서 안타까운듯한 표정을 짓는 일은 과거 죄상에 대한 반서의 한계는 차치하고, 역사의 실체를 한껏 외면하려는 몰염치의 표출이 아닐까?
한국인들의 강력한 요구와 추궁이 있을 때면, 그저 마지못해 36년의 1년치도 못되는 일들을 명백한 자기반서이나 뚜렷한 각성도 없는 추상적인 수사를 내뱉고는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났으니 새로 시작하자고 하는 일본식의 과거청산의 한계를 우리는 다시금 확인
하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일들을 사실로 위장하고, 억지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모함하며, 선량한 한국인들의 자긍심을 묵살하려는 소아적 이기주의를 버리고 새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진실로 이루어야 할 것은 진정한 이해와 선린우호의 구축인 것이다.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3.04.19
  • 저작시기2003.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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