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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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시의 세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초당
1)왕발
2)낙빈왕
3)노조린
4)양형
5)진자앙

2. 성당
1)맹호연과 전원산수시파
2)왕창령과 변새시파
3)고적 변새시파
4)잠삼
5)장구령
6)이백-시선
7)두보-시성
8)왕유-시불

3. 중당
1)백거이
2)한유
3)유종원
4)원진
5)이하

4. 만당
1)두목
2)이상은
3)나은
4)두순학
5)피일휴

본문내용

먼저 신세의 불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은의 강직한 개성과 여러 차례의 낙제로 인한 불만이 주된 내용이 된다. 두 번째는 개인적으로 겪은 변고와 당왕실의 불안함, 그 변화와 대한 대응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로 나은은 성격상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했지만, 한번 맺은 교우관계는 다른 사람들보다 깊고 감동적이다. 따라서 그들과 연관된 작품은 모두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위성봉고인(魏城逢故人)
一年兩度錦江遊, 한 해에 두 번이나 금강에서 놀았는데,
前가東風後値秋. 전에는 봄의 동풍이 불더니 후에는 가을이 되었구나.
芳草有情皆碍馬, 방초도 정이 있어 모두 떠나는 말 가로막고
好雲無處不遮樓. 고운 구름은 누대를 감싸 돌지 않는 곳이 없구나.
山將別恨和心斷, 산은 이별의 한을 품어 가슴을 에이고
水帶離聲入夢流. 물은 이별의 슬픈 소리 내며 꿈 속에 흘러드네.
今日因君試回首, 오늘 그대 고개 돌려본다면,
澹煙喬木隔綿州. 맑은 안개가 높은 나무에 걸려 면주와 격해 있으리.
또 나은의 시는 인생과 경물을 대비시켜서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묘사하는 것이 많다. 곧 자연경물을 삶의 역정과 상관시키는 방법이다.
나은의 영회시는 영물시에 비하여 용사(用詞)가 평범하고 담백하다. 따라서 박실하면서 진지한 표현을 한다. 전고의 사용도 고사의 사실성에 주력하고 시의 대우는 구어체를 구사하므로 특수한 정절이나 요체를 강구하지 않으며 상징적 표현법을 적게 운용한다.
**참고도서:'사람과 책',《中國詩와 詩人(당대편)》,이병한 외 22인 공저.
'청년사',《중국문학사(상)》,김영덕*허용구*김병수 편저.
(4)두순학(杜荀鶴)
두순학(846∼907)은 자가 언지(彦之), 석태 사람이다. 그는 집이 가난하였고 여러번 과거에 낙방한 끝에 46세에 진사 급제하였으며, 당대가 망하자 주온의 한림학사가 된 지 닷 새만에 죽었다. 피일휴와 함께 만당의 현실주의적 경향의 시파를 대표할 만한 사람이다. 두순학은 "대장부 세상에 나설 뜻 가졌나니 내 한 몸 거두기 위함이 아니라네"라고 하면서 사회에 공헌해 보겠다는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관계에는 뒤늦게 이름이 알려졌으나 시단에는 일찍이 이름이 알려져, 그때 사람들은 그의 장대한 표현을 칭송하였고 탐욕자를 청렴하게 하고 사악한 신하를 바로잡아 줄 글이라고 했다. 두순학의 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난 이후의 사회와 백성들의 고난을 여러 가지로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소 봉기군이 장안 점령하자 군벌은 도처에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시인은 '평민을 닥치는대로 살해하고(亂殺平民)' '무덤을 파헤치는(荒墳開)'군벌들의 죄행을 폭로하였다. 두순학의 문학적 주장은 백거이와 비슷하였다. 그는 시가로 당대 말기의 암흑같은 현실과 인민들이 받은 재난을 폭넓게 반영하였다. 시인은 백성들을 동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벌과 관리들을 몹시 증오하였다. 《또 호성현을 지나며(再經胡城縣)》는 힘있고 선명한 언어로 봉건 관료에 대한 죄악을 집약적으로 폭로하였으며 그들을 저주하였다. 그는 세련되었으면서 쉽고 통속적인 용어를 잘 살려 시를 썼고, 더구나 이전의 사람들은 사회문제를 악부체로 쓰는 게 보통이었으나 그것을 근체에 잘 가다듬어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작시기교 면에 있어서 상당한 성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고도서: '청년사',《중국문학사(상)》, 김영덕*허용구*김병수 편저.
'신아사',《중국문학사》, 김학주 편저.
(5)피일휴(皮日休)
피일휴(843?∼883?)는 자가 일소(逸少),뒤에 습미(襲美)라 고쳤으며, 양양 사람이다. 젊어서 한 때 숨어살기도 하였고 또 전국 각지를 유랑하기도 하여 현실사회에 대하여 많은 것을 체험했다. 뒤에 진사가 되어 태상박사가 되기도 하였으나 883년 황소가 패배하여 장안에서 물러나온 후에 장안에서 죽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는 만당의 어지러운 사회와 민중들의 고난을 목도하고는 그것을 《정악부(正樂府)》10편과 《삼수시(三羞詩)》등으로 노래하였다. 그는 당시 사회현실을 꼬집어 "옛날 관리들은 도적을 쫓기 위해 있었는데, 지금의 관리들은 도적질을 하기 위해 있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으니 그의 현실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피일휴는 《문수(文數)》에서 악부시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그는 시가의 미학적 작용과 풍자적 기능을 중시하였는 바 이것은 백거이 시가 이론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일휴와 육구몽간에 행해진 화답시는 창화(倡和)시에 속한다. 피일휴의 허다한 구어 사용은 근체시, 특히 창화시에서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상호간의 친분이 두터운 지기에게 격의없는 절친감을 느끼며 시를 썼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이든 송별시는 애상이 깃들기 때문에 우수, 비애, 연모등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피일휴의 송시는 슬프지 않다. 출사하는 우인에 대한 축의가 넘치고 온화한 격려의 우정이 있는가 하면 선기(仙氣)가 서려 있기도 하다.
시에서 경물묘사는 경중유정(景中有情)의 특성을 중시하는데 피일휴의 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은 《추강효망(秋江曉望)》처럼 경과 정이 따로 묘사된 듯하면서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정경분사(情景分寫)의 경우와, 경중에 정을 담고, 정중에 경을 싣고 있는 정경교융(情景交融)의 경우가 있다.
피일휴 시는 위에서 말했듯 사회현실을 솔직하게 묘사한 점에서 두보, 원진, 백거이등의 영향을 크게 받아, 만당시에 역풍을 불어넣은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또 피일휴에 있어서 유미주의는 유염한 풍유와 편벽한 묘법에 초점을 맞추고, 탈속의 의미는 도불적(道佛的)시취에서 찾을 수 있다. 피일휴의 《태호시(太湖詩)》20수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영물시는 자연물을 빌려서 자신의 심회를 기탁하는 하나의 은유적인 시의를 내포한다. 피일휴의 영물시는 그 소재가 어(漁), 다(茶),주(酒),초(樵)등에 집중되어 있다. 또 사물의 묘사가 진지할 뿐 아니라, 제재의 선택에 있어서도 섬세하고 다양하면서 우아한 묘(妙)를 지니고 있다.
**참고도서: '사람과 책',《中國詩와 詩人(당대편)》, 이병한 외 22인 공저.
'청년사', 《중국문학사(상)》, 김영덕*허용구*김병수 편저.
'신아사', 《중국문학사》, 김학주 편저.

키워드

당시,   왕발,   노조린,   백거이,   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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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9페이지
  • 등록일2003.10.15
  • 저작시기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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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2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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