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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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대구시
*역사*위치*기후*지형*대구의 강*대구의 산*인구*공원

*문화재와 관광

본문내용

였으며, 그 후 300여년뒤 주지 포산화상이 복건 했다고 전한다.
관음전, 독성, 산신각, 칠성각등이 있는데 관음전의 불상은 고려말기에 조각되었다고 한다. 임휴사라는 사명(寺名)은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 동수대전 싸움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해고 견훤의 추격을 피하여 반야월과 앞산의 안일사를 거쳐 이곳으로 와서 기도를 드리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찾아 쉬어갔다는 데서 연유한다.
1996년 5월 주지 혜담스님이 법당과 요사의 중창을 시작하여 현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관음전 옆에는 석샘이 있어서 위장병에 특효가 있는 약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 사찰은 대구 근교에서 유일한 관음 도량으로서 많은 불자들의 정신적 귀의처가 되어 왔으며 1988년 전국 70여개의 전통 사찰 중 하나로 문공부에 등록된 유서 깊은 관음기도 도량이다
-날뫼북춤
날뫼북춤은 대구의 비산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민속춤으로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 가락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비산농악의 등과 그 뿌리를 같이 하지만, 특히 북만을 가지고 추는 북춤으로 발전한 점이 특이하다.
날뫼란 지명은 다음과 같은 전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아득한 옛날 달내(達川)의 냇가에서 빨래하던 여인이 서쪽 하늘에 요란한 풍악 소리를 듣고 바라보니, 하늘에서 산모양의 구름이 날아오고 있었다.
여인이 이를 보고 놀라 "동산이 떠온다"고 비명을 지렀더니, 날아오던 산이 땅에 떨어져 동산이 되었다. 날아온 산이라 하여 날뫼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는 飛山이라 쓰게 되었다. 현재의 비산동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지금의 날뫼 원고개는 달성(達城)과 금호강 사이의 넓은 들판을 지나는 서울나들이 길이었다. 옛날 한 원님이 특히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이 원님이 순직하자 백성들은 이 원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곳에 무덤을 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제사때는 백성들이 원님의 혼령을 달래기 위하여 북을 울리며 춤을 추었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 날뫼북춤이라고 전한다. 옷차림은 모두 흰바지저고리에 감색 쾌자를 입고 머리에 흰띠를 두르며 연향과정은 정적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 츰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존석굴
군위 삼존석굴(일명, 제2석굴암)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250년이나 앞선 석굴사원이다.
이 석굴사원은 493년(신라 소지왕 15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했으며, 오랫동안 인근 주민들의 치성터로 쓰였다가,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는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굴은 높다랗게 치솟은 바위벼랑 중간쯤에 조성되어 있으며, 입구는 둥글고 내부는 방형을 이룬다. 당당한 기상의 아미타불이 가운데에 앉고, 화려한 장식의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좌우에 서 있다. 삼존석굴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한밤마을이 나타난다. 한밤마을은 수백년된 기와집과 돌담길이 이어진 전통민속마을로, 부림 홍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대청·석불입상 등의 문화재가 있으며, 마을 입구에 노송숲이 운치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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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21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3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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