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미술에 대하여 (80년대 미술계의 주요변화와 민중미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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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80년대의 미술에 대하여 (80년대 미술계의 주요변화와 민중미술을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국전폐지와 납북미술가 해금조치
2. 민중미술의 형성과 전개
3. 현장미술의 형성과 전개
4. <현실과 발언>의 출현
5. 소집단 운동
6. 민중미술가들
7. 수묵화 운동과 동양화의 새로운 전기

Ⅲ. 결론

본문내용

의 조건이 한데 작용함녀서 생존을 위해 '기능화 된' 일정한 삶의 경향성이 내표되어 있다. 따라서 '전통의 현대화'란 어찌 보면 억지춘향일 수도 있다. 전통을 전통 자체로 제대로 인식하고 다른 한편 그것이 오늘의 삶에 기능적으로 요구되는 경우에 한해서 비로소 전통은 현대적 삶의 맥락에서 올바른 위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전총을 지닌 사회에서 수묵정신이 자연에 대립되는 인간사회의 인륜정신을 상징한다면 방대로 색채는 자연정신의 꽃이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의 빛을 상징할 것이다.
) 상게서, pp. 177-178.
박생광의 채색화들은 이런 채색의 뜻을 전통의 의미로 회복시켜내는 작업이었다. 「여서낭당」과 「무당-국사당」에서 우리는 깊은 산자락, 계곡의 안쪽에 자리잡았던 사당터, 성황당에 나부끼며 흥을 돋우고 슬픔을 가눌 수 있게 하는 온갖 도상의 형형색색의 선과 색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가 무당에게서 본 것은 무당이 끌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기능과 그에 따른 온갖 형태의 이미지들이었다. 그는 무당의 이미지가 지닌 형과 색을 우리의 전통적 믿음에서 회복시켜 그 색과 태가 지닌 지존의 빛이 바래지 않게 하는 일을 그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성재휴의 한국화에는 현대 동양화가 찾아나가야 할 길에 대한 나름의 진단이 담겨있다. 그의 그림이 지닌 청명한 계곡의 밝은 빛과 햇살의 숨소리처럼 맑고 분방한 기개는 1920-1930년대 이후 한국화가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추구해 온 한국 동양화의 올바른 현대화 방향에 대해 스스로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 「임간수로」에서처럼 격이 있되 서양적 세렴미는 아닌 화풍은 동양화라고 할 수 있으나 전통적인 동양화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있기에 현대적이라 할 수 있다. 또 「돛단배」도 산수를 소재로 했지만 도시화된 문명의 멋을 아는 사람이 바라보고 느겼음직한 감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와 같이 그가 이룩한 한국 동양화의 성과가 만일 1970년 이후의 우리 미술계에 제대로 인식되고 계승되었더라면, 현재 대부분의 한국화가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나름대로 올바른 길을 태아 정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Ⅲ. 결론
87,88년 양대 선거를 거치면서 민중미술 진영은 선거기간동안 노정(露呈)된 정치적 입장과 노선의 차이가 얽혀 자체 내 분열양상을 띠게 된다. 이와 같은 분열양상은 미술 본래의 문제와 관련해 나왔다기보다는 변혁노선, 정치적 입장, 조직론의 차이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민중미술은 이때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 만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제2세대 민중미술 작가, 이론가들은 종전의 소수 지식인 중심의 운동방식에 한계를 일제히 지적하면서, 다수 민중 중심으로 양적인 확산(사회운동,노동운동)을 거두자는 최초의 발상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 학생운동과 접목하면서 사회과학이 제공한 지식에 얽매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민중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문화」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비약과 노동계급의 문화건설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모순이 먼저 청산되어야 한다는 급진론에 매달리게 되었다.
소시민적 관행에 젖어 있다고 판단하는 「민족미술협의회」가 민중적 실천의 요구로부터 이탈함으로써 더 이상 정치투쟁을 같이할 수 없다고 여긴 신세대들은 88년 「민족미술운동 전국연합걸설준비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단체를 좆기하고 지역미술운동과 학생미술운동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사상적, 미적 입장을 통일시키고자 했다. 이 단테의 결성으로 민중미술은 양분되었지만, 전국에 산재한 미술인들과 단체를 그 산하에 둠으로써 지역/중앙의 차별화를 해소하고 또한 현장중심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실천적 파급력을 증진시켰다는 일정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는 한계를 노출시키는 역기능을 몰고 왔다.
이렇듯 종래의 민중미술이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관념을 기초로 전개되었다면 이들의 정신적 기초는 사회주의적 이념이고 그들의 말대로 「당파적인」정치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이 삶을 구제하고 예술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보았지만 결국 민중미술을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귀속시켜 예술을 시위와 선전, 선동의 도구로 추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밖에도 예술성을 「문화주의」로, 서구문화의 이해나 수용을 「수구추수주의」로, 전시장 미술을 「제도권」으로 기법숙련을 「손장난」으로 매도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음녀서 좋던 싫던 자본주의 토양 아랴 성장한 부르주아 미술을 베어내는 대신 품종을 개량한 노동계급미술의 파종만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민중미술은 이념이나 지식의 일개 번안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비록 「소시민적 관행」에서 벗어나 목적의식적, 조직화된 미학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것은 오히려 민중미술을 경직화, 기계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으며 급기야 민중미술 본연의 생명력을 감최시키는 지점으로 귀착되었다. 「당파적 현실주의」가 첨예한 정치의식, 현실적 절박성 때문에 유발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다시 말해 아무리 암중모색 끝에 끌어낸 「당파적 현실주의」라 하더라도 그것이 기존 미술의 전문성과 예술성을 능가할 만한 능력을 보이지 못한다면 불행하게도 그러한 「지도원리」는 개인 작가의 상상력, 개성, 자율성을 억압하는 이름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입증시켜준 셈이다.
또한 수묵화 운동 이후, 80년대 중반 이후의 양상은 단순한 표현구조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내용이 두드러지게 된다. 80년대 전반이 민중미술이라는 집단적 운동에 지배되었다면 후반은 개별적인 작가 단위의 실험이 전개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1. 강성원 편론집,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근현대미술』, 사계절, 1999
2. 국립현대미술관, 『민중미술15년(1980-1994)』, 삶과 꿈, 1994
3. 서성록,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1994.
4. 오광수, 『한국 현대미술의 미의식』, 도서출판 재원, 1995.
5. 이일 미술평론집, 『현대미술에서의 환원과 확산』, 열화당, 1991.
6. 주재환 감수, 『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 학고재, 1996.
논문
1. 윤범모, 『나의 20세기 상상미술관』, 계간 가나아트, 1999
2. 최태만, 『사회에 대한 인식과 참여』, 계간 가나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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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28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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