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유신에서 청일전쟁까지 일본정부의 동아시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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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치유신에서 청일전쟁까지 일본정부의 동아시아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Ⅱ. 메이지 유신기의 한·일 관계

Ⅲ. 강화도 조약과 한·일 관계

Ⅳ. 임오군란과 한·일 관계

Ⅴ. 청·불 전쟁기의 한·일 관계

Ⅵ. 갑신정변과 한·일 관계

Ⅶ. 거문도 사건기의 한·일 관계

Ⅷ. 청·일 전쟁과 조선

Ⅸ. 결

본문내용

구미 열강과의 조약 개정을 통해 동아시아 패자로 등장한 다음 이를 동아시아 각국에 강요하려고 한 것이다.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에서 발생한 동학농민봉기는 이러한 일본의 대조선 보호국 확립 정책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학농민 봉기가 6월 11일 전주화약으로 사실상 결말되자 조선에 파병한 청과 일본은 계속 주둔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군대의 주둔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청·일 양군이 농민군을 진압하고 공동으로 조선에 개혁을 요구하도록 하자는 안을 청에 제안하였지만, 예상대로 청은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열강에 조정을 의뢰하는 공작을 개시했다. 이에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결정하고 청과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영국과의 조약개정 작업이 마무리되어 구미열강의 간섭이 배제됨으로 주저없이 청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이 청을 압도적으로 이김으로써 1895년 4월 17일 청·일 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개국 이래 꾸준히 추진해 온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정책, 즉 조·일 불평등 관계의 고착화와 청·일 불평등 관계의 수립이라는 재편정책이 결실을 보게 되었으며, 일본을 우위에 두는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창출하게 되었다.
Ⅸ. 結
일본은 명치유신에서 청·일 전쟁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에서의 우의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 일본정부는 구미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에 대한 개정 노력에 매진하였으며, 결국 개정함으로써 구미 열강과 대등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청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에 대한 양향력이 강화되었으며,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군국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참고 문헌)
信夫淸三郞 편, <日本外交史> Ⅰ. 每日新聞社,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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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部政男, 「琉球から中繩へ」, 『(岩波講座)日本通史: 近代 1』16, pp. 146∼148, 161∼ 167; 金基赫, 「開港을 둘러싼 國際政治」, pp. 21∼23.
福澤諭吉, 「脫亞論」, 慶應義塾 編, 『福澤諭吉全集』10(東京: 岩波書店, 1960), p. 240.
최석완, <松方財政期의 육해군 확장문제>, <中央史論> 10·11,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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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3.12.03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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