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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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프랑스의 고립주의 정책
2.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한 외교정책
3. 대영정책과 식민지정책

Ⅲ. 결 론

본문내용

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쯔 요셉이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만약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한다면 그 원인이야 어쨌든지 간에 바로 그 다음날에 동원령을 내리겠다고 언명할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는 콘스탄티노플로의 여행을 11월에 하기로 빌헬름 2세가 결정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그것을 제지할 수도 없었고 실제로 그것을 제지하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다. 국내외적으로 불리해진 상황 속에서 늙고 지친 그는 1890년 3월에 사임하였다.
Ⅲ. 結 論
비스마르크는 국제정치 분야에서 오랫동안 굉장한 명성을 얻었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유럽에서 평화가 20년간 유지된 것은 주로 그의 공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비스마르크 자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강대국들을 교묘하게 외교적 그물 속에 엮어 넣음으로써 전쟁을 너무나 위험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피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강대국들이 유럽에서 대전을 벌리지 않으려고 한 희망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소였다. 1880년대는 식민지 확장의 시기였기 때문에 이것이 관심을 유럽으로부터 밖으로 돌리는 자연적인 피뢰침의 역할을 하였다. 러시아는 동쪽으로 천천히 진출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영국은 아프리카의 정복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들이 유럽 내의 상황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비스마르크가 외교술의 대가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 점에서는 오직 세일즈베리에 의해서만 비견된다. 그는 강대국들의 경쟁관계를 이용하거나 조장하여 독일에 적대하는 어떤 동맹이 성립하는 것도 막았으며, 독일의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 점은 매우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될 수는 없다. 사실을 말한다면 그는 어떤 사람의 능력으로서라도 오랫동안 지배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에 있다. 1860년대에 그가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던 밀실외교는 1880년대에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이제 공공여론이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있었고, 따라서 국가 간의 우호관계를 마음대로 바꾸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비스마르크는 알사스-로렌 지방을 잃으면서까지 프랑스와 화해할 수는 없었으며, 프랑스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려는 시도에도 실패했다. 프랑스의 여론이 정치가들로 하여금 결코 1870년을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스트리아-형가리 및 러시아와 계속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양국의 여론이 점점 경쟁관계를 부추기고 있었고, 독일의 여론 또한 1890년까지는 오스트리아편에 확고히 서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스마르크가 성공을 거둔 것은 기껏해야 이 경쟁관계 속에 독일을 더욱 깊이 관련시키는 것이었다. 최소한 그는 오스트리아를 제어할 수 있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고, 따라서 독일은 결국 강대국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보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불안정한 동맹국을 돕기위해 전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디 점에 있어 비스마르크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수상직에 있었던 마지막 한두해에 그 자신이 자신의 정책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며, 독일이 러시아와 점점 멀러지고 있는 것을 별 수 없이 방관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국제관계를 권력정치의 행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그것은 다른 나라의 외무장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비난받을만하다. 그는 비밀동맹과 대 군사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독일의 군사비 지출은 1870년의 950만 파운드에서 1890년에는 2400만 파운드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어떤 다른 강대국에 비해서도 크게 늘어난 것이었으며, 단지 프랑스만이 1300만 파운드로 늘어서 가까스로 독일의 접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동맹관계와 군비확대가 국제관계에 있어 중요한 구성인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권력정치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이, 동일한 도덕법칙에 종속하는 국제적 공동체 및 그 국민들의 공통된 열망에 관한 폭넓은 구상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라 소위 '교수' 글래드스톤이 갖고 있었던 유럽의 협조하는 이상적인 견해를 매우 경멸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정치가들의 유럽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그들의 자신의 이름으로 요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다른 강대국에게 요구할 경우라는 것을 항상 발견했다"고 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것은 아마 그럴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기말 경에는 경제적, 기술적 진보가 세계의 모든 부분을 서로 더욱 긴밀한 관계로 만들었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적 공동체가 배태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미래적인 사태의 발전에 관한 한 맹목적이었으며, 이러한 것을 고려하기에는 매일매일의 외교적인 미덕이라면, 자제의 감각과 함께 위험의 한계를 깨닫는 날카로운 안목을 들 수 있다. 1887년에 제국의회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이 점을 잘 드러낸다. "어떤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그의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서 다른 국가들의 정책에 압력을 가하거나 영향력을 미치려 한다면-사태를 책임지려 하면서-그것은 신에 의해 그 국가에게 할당된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이익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고, 권력정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단지 위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후계자들은 이 위대한 정치적 재질을 명백히 결여하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비스마르크의 권력정치에 내재해 있던 이기적인 방법들은 유럽에 재앙이 되는 유산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참 고 문 헌
1) 採求堂, 『독일근대사』, 윌리엄카저
2) 정해본, 『독일근대사회 경제사』,지식산업사
3) 金 正, 『근대외교사』, 好樂社
4) 홍영주,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78年
각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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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6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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