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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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화사상>

<형 성>
-영선사(領選使)
-신사유람단 (紳士遊覽團)

<내용과 성격>

<개화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

본문내용

못함으로써 정변이 실패하는 역사적 한계를 갖게 하였다. 또한 지주적 토지소유를 옹호하는 개화사상의 이러한 측면은, 당시 지주제의 존속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식민지화를 획책하던 구미 열강과 투쟁할 내적 근거를 박약하게 하였다. 때문에 개화파는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구미 열강의 본질인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정변이 일본을 이용하려던 개화파의 주관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배반으로 실패한 것은 결국 침략자의 본질을 원조자로 잘못 인식한 데 있었다.
개화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적 개혁사상이었고, 또한 당시 세계발전의 역사적 추이를 인식한 선진적인 사상이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대다수가 양반관료이자 대지주 출신이라는 계급적 제한성은 지주적 입장을 옹호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게 하였고, 그들이 개혁의 모델로 삼은 일본과 구미열강의 침략성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가졌다. 정변이 실패한 뒤 급진개화파는 사라졌지만, 개화사상이 지향한 개혁의 방향과 한계는 근본적인 변화없이 갑오개혁과 그후의 독립협회파로 이어졌다.
<개화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
한국언론의 근대화는 19세기 말엽에 개시된 개화운동의 한 배경이며 동시에 그 핵심이다. 근대언론은 곧 조선말 변혁운동을 견인하던 강력한 추진체였고 이 추진체의 동력은 개화당 세력이었다. 우리는 흔히 역사발전의 힘이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마치 사람의 역량이 해부학에서 밝혀낸 뼈의 힘이라고 보는 것처럼 허황된 것이다. 개화라는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인 상황의 성숙에 조응한 개화당이라는 주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뜻에서 개화는 인간 중심적 역사의식으로 볼 때 조선 봉건사회를 개조하려는 세력이 역사 전면에서 능동적으로 활약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복합적이고 다양하며, 각종의 원인들에 의해 중층적으로 우연과 필연의 융합이 결정되는 역사적 사실들을 어떤 심급(instance)까지 파고 들어가 볼 수 있는가 하는 역사적 사건의 형식과 그 고유한 본질에 대한 인식론적 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화파와 언론 근대화 과정의 관련성에 관한 더 깊이 있는 해명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개화파가 역사발전에서 기여한 공로에 대해 남북한 역사인식은 크게 대조적이다. 북한의 역사가들은 개화파가 부르주아 혁명운동을 조직해 간 정치세력으로서 봉건통치자와의 타협이 아닌 폭력적 방법 즉 무장정변으로 사회변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혁명적 성격 내지 부르주아적 개혁세력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개화사상을 폭넓게 발전시키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김옥균인데, 그는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一名 유대치) 등에게서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개화파들의 사상·정치적 견해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부르주아 민권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으나 개화파 자신들의 계급적 입장과 관점에서 나온 본질적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봉건제도의 철저한 청산을 제기하지는 않은 것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남한 학계에서는 개화사상이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이를 계승했다는 점에서부터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다. 주진오 교수는 후쿠자와의 영향에 비중을 두고 개혁사업 추진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도입을 모색했던 점 등을 들어 일본의 자유민권사상가의 영향을 중시하여 개항 이후 급격히 성장한 상인자본에 주목하지 않은 북한 학계의 연구성과를 비판하고 있다. 그밖에도 1874년 이전에 개화파가 하나의 당파로 성립하였는가. 개화파가 일본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갑신정변은 과연 부르주아 혁명(개혁)인가. 개화파가 부르주아 민족운동으로서의 지도역량이었는가를 의문시하고 있다.
반면 남한학계 일부에서도 개화파를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개혁운동이 급박해진 상황에서 시민계급의 성장을 기다리기보다는 일본의 무력을 이용하여 '위로부터의 혁명 내지 개혁'을 모색하려는 과정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개혁(혁명)수행의 방법론적인 모방을 한 점이 있다는 논지를 펴는 학자들도 있다.
개화파의 무장역량에 대해서도 그 성공 가능성과 별개로 북한 학계에서는 비교적 크게 보고 있으나 남한 학계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데 이는 남한 학계가 개화파의 주체가 가진 역량, 보조역량들과의 결합과정에서 증폭될 수 있는 후차적 역량을 평가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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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3.03
  • 저작시기2004.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4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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