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교육사상과 한국교육사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동양의 전통철학과 교육
1. 유학사상과 교육
2. 불교사상의 교육
3. 도가사상과 교육
4. 동학사상과 교육

[2] 한국 교육사
Ⅰ. 고대사회의 교육
1. 고조선사회의 교육
2. 삼국사회의 교육
Ⅱ. 고려시대의 교육
1. 관학
2. 사학
3. 과거제도와 교육
Ⅲ.조선시대의 교육
1. 관학
2. 사학
3. 조선시대 교육사상
Ⅳ. 개화기 및 일제하의 교육
1. 개화기의 교육
2. 일제하의 교육
Ⅴ. 현대사회의 교육
1. 미군정기의 교육
2. 분단시대의 교육

본문내용

성장을 돕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가 국권상실로 고민할 때, 이들 미션학교가 교육구국운동의 한 주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3) 민간인사학의 설립
개화기에는 관공립학교보다 더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민간인 사학이었다. 민간인 사학은 기독교의 직접적인 영향의 학교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대체로 보아 기독교 선교에 의한 학교설립이라는 대세와 당시 사회의 요청인 개화열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인 사학은 원산학교이다. 이 원산학교는 원산의 향중부노(鄕中父老)들이 외국의 도전과 새로운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민중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이루었다는 점과, 또 외국인 혹은 관의 주도에 앞서 민중의 광범한 근대화 의욕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그 교육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원산학교에 이어 1895년에는 민영환이 흥화학교를, 1896년에는 민영기가 중교의숙을 세웠고, 1899년에는 안창호가 그의 고향 강서지방으로 돌아가 점진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서도에서 민간인이 세운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시에 또한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였다.
민간인 사학의 건학정신은 개화와 자주독립이라는 두가지 측면을 통해 그 정신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즉 1905년 이전에 세워진 사학은 개화라는 이름의 근대화를 실천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는데 이에는 이용후생의 실학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이때의 사학은 개화된 선진 여러 나라의 문물과 기술을 습득하고, 또 부국강병을 이루는데 목적을 두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의 침략을 당하게 되자 교육구국의 인재양성이라는 새로운 민족적 요망에서 많은 사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2. 일제하의 교육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은 조선을 병합하고자 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선 조선병합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통감부를 두고 조선의 지배체제를 그들의 야심에 부합할 수 있도록 재정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감부를 통한 그들의 교육정책을 살펴보면 첫째, 우민화가 기본방침이었다. 통감부는 이 방침을 수행하기 위하여 학제개혁을 단행하여 수업연한을 단축하였다. 둘째, 점진적인 동화정책을 썼다. 이 동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관공립 보통학교를 이용하여 식민지 정책에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상을 형성하고자 했다. 또한 동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어 보급에 열을 올렸다. 셋째, 일본인 교원 배치와 교과를 통하여 친일강화정책을 썼다.
(1) 무단통치기의 교육정책(1910-1919)
이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무단통치와 아울러 보다 철저한 조선인의 정신적 개조와 민족사상의 말살을 위한 교육 개혁이 단행되던 시기였다. 이 때에는 민족 사학을 탄압하여 사립학교의 수적 감소·감시·통제가 이루어졌다.
(2)문화통치기의 교육정책(1919-1936)
문화정치란 조선인의 거족적인 항일투쟁에 대처해서 조선인을 회유할 뿐만 아니라 악화된 국제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대외전선용의 기만적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들의 문화정책에 따라 새로운 교육제도를 모색했고 보통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를 확충 정비하여 갔다. 한국인의 사범학교·대학진학의 길이 열렸고, 문화정책을 추진하여 제한적인 조선어 교과 수업이 허용되었고 실업교육·전문교육·대학교육은 일본의 제도에 따랐다. 이시기의 교육은 표면으로는 일본학제와 동일하게 하는 융화책을 사용했으나 그 이변의 속셈은 동일한 교육제도와 교육기간을 확충함으로써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여 우리 민족의 사상을 말살하려는데 있었다.
(3) 군국주의 침략기의 교육정책(1936-1945)
이 시기 일제는 조선에 대한 교육의 근본방침으로 國體明徵, 내선일체라는 슬로우건을 내세우고, 조선인을 일본인화하는 일과, 조선인을 총동원하여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공급하는 일에 모든 교육적 노력을 기울였다. 구체적인 일제의 교육정책을 보면 교육을 생활이라 하여 근로주의를 주장하고 초등교육의 확충, 농촌간이학교 제도의 창설, 사범교육기관의 확충, 실업교육의 진흥을 도모하려했다. 이는 준전시체제속에서 학생들에게 일본신민화의 사고를 확보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Ⅴ. 현대사회의 교육
1. 미군정기의 교육
미군정하에 제정된 교육이념은 홍익인간으로 문교정책을 살펴보면 첫째, 교수용어로 한국어를 사용케 하였고 일제의 잔재인 황국사상의 조속한 불식을 위해서 국민 교육의 기초가 되는 초등학교의 교과서 편찬사업 및 보급에 힘썼다. 둘째, 민주교육이념의 보급을 위해서 교사 재교육강습에 주력하였다. 넷째, 교육제도의 민주화이며 문명퇴치를 위하여 전국적으로 성인교육을 행했다. 이는 종래의 교사중심의 수업방식에서 아동중심의 수업방식으로 전환시키고 교과중심의 교육으로부터 생활중심의 교육으로 가르치도록 지도되었다.
2. 분단시대의 교육
(1) 제1공화국의 교육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하자, 우리의 건국이념에 부합하는 교육 기본법의 재정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당시의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민주 국가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인격완성 등을 목적으로 삼았다.
(2)제2공화국의 교육
제2공화국의 교육은 학원의 민주화운동으로 출발한다. 4·19후 독재정권 아래서 자리잡은 학원의 비민주적 요소에 대한 제거운동으로 시작된 학원의 민주화운동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적극 가담한 교육관계자의 제거에서 시작하여 학도호국단의 해체와 학생회의 조직을 가져왔고 교육자치제의 강화를 위해 교육자치제도심의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3) 제3·4공화국의 교육
5·16군사혁명으로 인하여 제2공화국이 붕괴되고 혁명정부가 들어서서 간접침략의 분쇄, 인간개조, 빈곤타파, 문화혁신 등의 문교방침을 세웠다. 제3공화국의 문교정책을 살펴보면 민족주체성의 확립, 과학기술교육의 강화, 생산교육의 촉진이다. 그중 민족 주체성의 확립은 반공교육의 강화와 국적 있는 교육 및 국민교육헌장의 충효교육이념의 강조로 나타났으며 생산교육은 경제개발을 위한 교육의 역할강조로 나타났다. 그리고 유신 후의 제4공화국의 교육정책도 제3공화국의 그것과 기본이념을 같이한다 할 수 있다.
  • 가격2,3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3.05.17
  • 저작시기2003.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328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