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 광고를 통해 바라본 개화기(구한말)의 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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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황성신문 광고를 통해 바라본 개화기(구한말)의 사회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서 론

II.황 성 신 문 개 괄
1.황 성 신 문
2.황 성 신 문 의 광 고

III.황 성 신 문 광 고 분 석
1.사 회 적 측 면
2.경 제 적 측 면
3.문 화 적 측 면

IV.결 론

본문내용

육종원의 광고로 매일신문에 게재되었으며, 황성신문에 실린 광고 대개가 국한문 혼용으로 작성된 반면에 순한글로 작성되었음이 대조가 된다. 광고내용을 읽어보면 "보기 좋은 꽃나무 등을 싸게 파니 첨군자(僉 君子)는 왕림하기 바란다"는 내용으로 육종원의 위치를 왜장터 아래로 적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예장동 일대로 과거 구한말과 일제시대에는 이곳을 왜장터 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울특별시청 홈페이지『지명유래』 www.seoul.go.kr
6) 중동전기(中東戰記) 광고
1899년 5월 20일에 실린 <중동전기>의 국한문판 발간과 더불어 이를 판매한다는 광고이다. 중동전기는 1894년 발발했던 청일간의 전쟁을 내용으로 씌어진 책으로 후에 이승만에 의해 한글판으로 번역되어 청일전기(淸日戰記)란 제목으로 하와이에서 간행되었던 책이다. 광고를 보면 중서 대동서시(大東書市)의 웃웃집에 있는 유우현의 집에서 권당 50전에 판매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당시 외국 서적을 번역 출간하는 것도 빈번히 이루어진 듯하다.
7) 국전사진관 안내광고
1900년 10월 10일에 실린 국전사진관(菊田寫眞館) 광고이다. 광고를 읽어보면 "새로이 사진관을 열었는데, 새로운 구미각국의 기술을 사용하여 색 변함이 없고, 남녀 사진장소가 달라 서로 사진찍는 곳에 출입을 금지하니 이를 주의하라" 는 내용인데, 당시에는 개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찍는 장소에 있어서는 남녀가 유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뒷부분을 보면 개업을 기념하여 특별히 한 달간은 정가의 반액만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마케팅 기술이 당시에도 이용되었음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8) 흠흠신서(서적) 판매광고
1901년 7월 23일자에 실린 <흠흠신서(欽欽新書)>를 판매한다는 안내광고로, 한동(漢洞)에 있는 광문사(廣文社)에서 발행되었으며, 위암 장지연이 간행하였다. 흠흠신서는 원래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책으로 정약용을 존경하던 장지연이 목민심서와 더불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광문사에서 간행하였다고 한다.
9) 국민신문(國民新聞) 창간안내 광고
1904년 9월 10일자에 실린 국민신문 창간 안내광고이다. 좌측 광고를 보면 신소설 작가 이인직이 발기인의 첫머리에 올라 있는데, 이인직은 후에 만세보의 주필과 대한신문의 사장이 된다.
10) 대한일보 구독안내 광고
1904년 3월 15일에 실린 일본인이 발행하는 한국어신문인 대한일보(大韓日報) 구독 안내광고로, 대한일보는 인천에 있는 조선신보사에서 창간하였다가 서울로 옮겼다. 사장은 아리후 주로[蟻生十郞]로 1906년 8월 한글로 발간하던 신문은 폐간되고, 10월 17일부터는 일어신문으로 발간하였다. 이 신문은 그 해 1월 23일부터 신소설 《일념홍(一捻紅)》을 연재하고, 4월 18일부터는 《참마검(斬魔劍)》을 연재하여 신문의 신소설 연재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10년 4월경 제호를 《조선일보》로 고쳐 발행하였다.
네이버 두산 대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php?id=352275&cid=AD1033036743044&adflag=1
IV. 결 론
지금까지 황성신문의 광고를 사회, 경제, 문화로 나누고 각각의 광고를 미흡하나마 분석하여 보았다. 황성신문이 창간되었던 1898년은 1876년 개항 이후 20년이 넘은 해였다. 이때 우리나라는 일본, 청, 러시아 세 나라의 각축이 어지럽게 펼쳐졌던 시기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항 이후 서구상품이 물밀듯이 들어와 도시인은 물론 농민의 일상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이러한 외국의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막대한 재화가 국외로 유출되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국민의 외제상품 선호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실제 광고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황성신문의 광고를 들여다보면, 마치 세계시장의 각축전을 보는 듯이 각국의 상품광고가 판을 치고 있다. 이러한 외세, 특히 일본과 청나라의 경제침투가 황성신문의 광고에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황성신문이 민족지의 성격을 가진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외국 광고주의 광고를 자신의 신문에 대거 싣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비단 황성신문만의 일이 아니라 당시 발행되었던 신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실제 독립신문도 신문의 제호만큼이나 그 성격이 분명한 민족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광고주가 많았다는 점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광고는 상품을 판매한다는 목적을 지닌 것이지만 시대가 흐른 뒤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박물관과 같은 기능을 지니기도 한다는 것을 이번 리포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신문기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활용품을 볼 수 있으며, 각종 정책의 시행 혹은 그 시대의 문화적 코드와 시대 상황들 또한 주로 판매된 상품을 통해 알 수 있으며, 보다 광의적으로는 광고의 표현을 통해서 당시의 의식세계까지 엿볼 수 있었다. 더불어, 역사는 돌고 도는 수레바퀴라는 말처럼 100년도 더 지난 과거의 광고를 통해 현재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새삼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다.
▒▒▒ 참고 문헌 ▒▒▒
김근용(1989),「대한제국시대 신문광고에 대한 일 고찰」,한국외국어대학교 석사논문
마정미(2000),『광고로 읽는 하이브리드문화-지루한 광고에 도시락을 던져라』, 문예출판사
신용하(1980),『한국근대사와 사회변동』,문학과지성사
신인섭·서범석(1998),『한국광고사』, 나남출판
이강필(1999),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 『뉴스플러스』 176호
이정민(1997),「일제 무단정치시대의 신문광고에 관한 연구-매일신보를 중심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사논문
정연식(2001),『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청년사, pp. 217 235
정진석, 「한국광고 100년-광복 이전」, 광고정보센터 http://www.adic.co.kr/dat/ad100/01.html
한은경(1997),「개항기 신문광고에 나타난 특성 및 시대상」,『광고연구』통권 16호, 1997년 가을
허영란(1998),「신문광고에 비친 근대」,『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1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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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16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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