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견해로 본 신라의 국가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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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고학적 견해로 본 신라의 국가성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본론.
Ⅰ.고고학적 견해로 보는 신라의 국가성립.
Ⅱ.경주의 지형과 고고자료의 분포.
Ⅲ.고고자료의 성격과 사회발전단계.
Ⅳ.육촌의 성립과 사로국.
Ⅴ.신라묘제의 변천과 기년문제.

Ⅲ.결론

본문내용

출현시기.
- 2-3세기경(신라의 적석목곽분이 고구려의 적석총이 남하하여 그 전에 내려와 土着化한 한식 토광목곽묘의 목곽과 結合한 것이라고 봄).
(2) '삼국사기'의 기년문제.
■ '삼국유사의 탈해왕 기사'
- 전체적으로 볼때 탈해가 아진포에 상륙한 뒤 그 일대를 기반으로 하면서 경주의 상층사 회에 침투, 토착화해 간 과정을 상징적으로 기술.
-'석총'과 '삼일월형봉'은 탈해왕이 신라의 동해안에 상륙한뒤, 그의 근거지가 된 해안지대 를 떠나서 경주 토착사회에 침투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관문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에 여기서의 '석총'은 경주 토착사회의 문화라고 보는 것이 타당.
■ '삼국사기 유리왕대의 고구려와의 교류, 점해왕때의 고구려와의 和親기사.'
- 新羅初期에 이미 압록강유성의 고구려와 交流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며, 그것은 압록강유 역의 고구려식 적석총이 경주지방에까지 流入되었을 可能性을 推測케한다.
=> 기원전 1-2세기 경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고구려의 적석총은 서서히 流入되었지만, 3세기경에 이르러서는 활발히 보급되었으며, 그기간은 최물왕대에 고구려와의 인질 外交 關係로 代表되는 것처럼, 新羅가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고구려의 影響下에 있 었던 시기였다고 여겨진다.
3. 횡구식석실분과 영토확장기.
(1) 횡구식석실분이란?
- 장방형의 석곽과 석실의 한쪽 단벽에 入口 시설을 만든 構造로, 횡혈식석실과는 區別되 며, 기존의 석실에 횡혈식설실이 영향을 미쳐 그 對應構造로 파괴와 폐쇄가 가능한 응급 적인 出入口 시설을 加味하여 생겨났다.
- 석곽분과 장방형석실분에서 횡혈식설실분으로 향해가는 過渡期의 形式이라고 認識.
(2) 횡구식석실분의 분포.
- 한강유역에서 경주지방, 낙동강 유역, 일본의 구천지방에 많이 분포.
즉 단일형으로 발전 파급된 횡혈식 석실분이 압록강유역과 대동강 유역을 거쳐 한강유역 등 韓半島의 남부지방과 일본열도로 파급되어갔음.
(3) 횡구식석실분의 特徵.
- 석실의 평명은 장방형, 천정 가구는 모두 평천정식이고, 벽은 곡면이 아니라 대체로 직 선으로 축조.
- 6세기경 경주에 出現하여 적석목곽분의 最終 段階 形式과 짧은 기간동안 共存하다가 곧 獨自的인 주류가 되었다.
(4) 횡구식 장방형 석실의 존속기간이 갖는 의미. .
- 6세기 전반부터 중엽에 이르는 시기로 법풍왕대와 진흥왕대에 해당되는데, 안으로는 제 도를 정비하여 귀족적인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고, 정신적으로는 불교를 공인하여 호국 불교로 국민의 정신을 統一시켰으며, 외부로는 振興王의 본격적인 征服事業이 이루어진 시기였음..
- 경주의 평지에 축조되었던 적석목각분이 대체로 종식되고, 새로운 묘제인 횡구식장방형 석실분을 受用하여 경주 외곡지대 산록인 서악동 등지에다 왕실의 묘지를 마련하였다.
- 原始的이고 번잡한 재래의 적석목곽분제도를 버리고 簡便하고 經濟的인 선진 묘제를 채 용한 것은 신라가 정복국가로서 성장하고, 당시의 동아시아 세계의 일원으로 參與한 하나 의 象徵的인 事件이라고 할 수 있다.
(5) 횡혈식 석실의 신라지역 유입.
■ 百濟, 고구려 양국관의 관계에서 비롯.
- 신라의 한강유역 確保와 그 이북지역인 고구려 영역에의 진출이 直接的인 계기가 됨.
■ 중국의 대제국 등장으로 인한 고구려의 勢力 弱化.
- 600년경-650년에 이르는 기간은 중국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을 입어 南方의 新羅를 견제 할 여유가 없었음.
■ 진흥왕 선덕여왕, 무열왕대의 중국과의 빈번한 교통.
- 신라의 제도 정비와 先進文化 收入의 적기였음.
- 김유신의 활약으로 統一을 대비하는 준비 기간이 됨.
=> 6세기 초에 낙동강유역으로 횡구식석실이 먼저 流入, 보급되기 시작하였으며, 7세기 초에는 振興王 이후의 시기에 국내 제도의 정비와 國力의 備蓄期를 맞이하여 전대 에 確保한 백제와 고구려의 영역에서 횡구식이 流入되었고, 특히 中國 帝國과의 긴 밀한 交流를 통하여 거기에서 성행한 횡혈식의 전실과 석실에서 돔 천정형식의 자 극에 의해, 경주에 횡혈식 석실이 急速度로 보급되면서 統一期로 이어졌다. 따라서 횡구식 석실과 횡혈식 석실의 出現과 流行은 신라의 成長과 發展을 의미..
Ⅲ.結論
신라의 國家成立에 대한 硏究를 고고학자료를 활용해서 분석해본 결과 고대경주지역사회는 지석묘단계사회-경주전역, 토곽묘(세형동검문화)단계사회-입실리지역, 토곽목관묘, 토광목곽묘(철기전용)단계사회-조양동 지역, 적석목곽분단계사회-경주분지 南部地域의 단계가 계기적으로 일어나면서 各各의 社會發展을 이룩하고 , 그에 따라 세형동검문화단계사회에서 육촌이 形成되고, 다음 鐵器 全用社會에서 斯盧國이 出現하였을 可能性을 주의 깊게 考察하였다.
사로국의 기반이 된 六寸社會는 고조선의 유이민이 가지고 남하한 세형동검 문화와 동해안을 타고 내려온 옥저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形成되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新羅墓祭의 變遷過程 중 제1단계에 해당되는 토광묘는 시조 박혁거세의 개국 이전부터 사로국 단계를 脫皮하는 미추왕대 쯤까지 存續하였다고 보여지며, 제2단계인 적석목곽분은 탈해왕의 시기부터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하여 대체로 낙지왕 무렵까지 존속하였으며, 제3단계인 횡구식적실분은 法興王에 유행하였으며, 제4단계인 횡혈식석실분은 진흥왕대부터 성행하여 통일기에까지 지속된 묘제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학 자료는 그 안에 우리의 뿌리가 되는 先祖들의 넋과 얼, 情神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 價値가 더욱더 중요한 것인 것 같다.
그 價値를 알고, 또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우리 先祖들의 現在의 人類에게 믿고 맡긴 것들에서 찾아야 되는 현재 우리들의 任務이며, 또 그 重要한 遺産들을 後孫들에게 현재 우리의 것까지 합쳐서 올바르게 물려주는 것이 반만년의 歷史 속에 무려 930여 차례의 외침을 받으면서 굳건히 나라를 유지해온, 現在는 大韓民國이라 부르는 이 나라를 앞으로 지속시켜 나가는 길이자 方法이 될 것이라 감히 생각해 본다.
[참고문헌].
강 인 구. <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 학연문화사. 1997
이선복, 『고고학개론』, 이론과 실천, 1988
{신라의 토우},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1976
신라, 가야사회의 기원과 생성.
한국고대국가 형성론.(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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