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고대의 취락과 생업 -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남면 월산 1리’의 조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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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월산리 지역 개관
가. 지리적 위치
나. 월산리의 역사와 지명유래
다. 취락의 입지조건과 인구 분포

Ⅱ. 가설의 설정

Ⅲ. 취락조사
1. 1차 조사
2. 2차 조사

Ⅳ. 가설검증

Ⅴ. 결어

본문내용

찾아보려 하였다.
2) 조사 내용
① 현재 월산리에서 살고 있는 성씨의 구성은 어떠한가?
-부안임씨 30가구, 남궁씨 3가구, 그 외로는 김씨, 박씨, 강씨, 한씨, 이씨 등이
1 ~ 2가구씩 있다.
② 월산리는 부안임씨들의 집성촌인가?
-그렇다.
③ 그렇다면 월산리의 이장은 부안 임씨들만 하는 것인가?
-꼭 그런것은 아니지만(임씨들이 많다보니) 역대 이장들을 살펴보면 임씨 7명,
남궁씨 2명, 박씨 1명으로, 대체로 임씨들이 하는 편이다.
④ 마을에 유지가 있는가?
-없다. 각자의 땅에 소규모로 농사를 짓고 있다.
⑤ 농업용수는 어떻게 이용하는가?
-근방 마을의 양수장에서 끌어다 쓴다. 마을의 북동쪽 미호천변에 위치한 곳에
1차 양수장이 있고 그보다 조금 아래에 2차 양수장이 있다.(두 양수장은
마을에서 도보로 약 40분 거리에 위치)
⑥ 교류가 잦은 인접지역은 어디인가?
-월산리의 서쪽에 위치한 양화리와 주로 왕래한다. 그것은 양화리를 거쳐서
밖으로 나가고 들어오도록 교통이 발달되어있기 때문이다
⑦ 외부와의 교류는 주로 어디에서 이루어졌는가?
-주로 이용하는 곳은 부강시장(화진나루)이었고, 대평시장(앵청이나루)은
가끔 이용하는 정도였다. 조치원시장도 이용했지만, 오래 사용하지는 않았다.
(장날-부강시장:5,10일 대평시장:2,7일 조치원시장:4,9 일)
다리가 놓여지면서 지금은 부강시장을 가지않고 육로로 조치원이나 대평시장을
주로 이용한다.
⑧ 마을회관은 언제 지어졌는가?
-30여년 전에 마을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목재건물로 지었었다.
⑨ 교회는 언제 지어졌는가?
-5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지었다, 교인은 약 20명 정도이다.
⑩ 외부로 어떤 일로 나가게 되는가?
-주로 식료품, 비료 구입이나 병원 때문에 왕래한다.(평균연령이 65세 이상
되는 고령화 마을이라 몸이 안 좋으신 분이 많았다.)마을에 슈퍼나 방앗간이
없으며 종촌에 소재한 농협을 주로 이용한다. 하루에 마을로 버스가 6회씩
운행되어 인근 종촌이나 조치원으로 나가게 한다.
⑪ 마을 공동 소유의 곡물 창고나 농기구가 있는가?
-마을 공동 소유의 '털망기'가 있으며 마을회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월산리에는 곡물창고가 없으며, 양화리의 곡물창고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 외의 농사장비는 집집별로 사용하는데, 집에 있는 탈곡기나 트렉터는 일부
집에만 있으며 마을에서 날짜를 맞춰 그 집에 일정한 돈을 지불하고 일을 해준
다.
월산 1리에 집하장이 존재하나, 사실상 공동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 마을 근처 발굴장에서는 현재 충남대학교에서 발굴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는 데, 현재까지 삼국 시대 이후의 저장 구덩이 형태의 유적만 발굴되고 있다고 한 다. 또 여러곳의 저장지와 고상가옥으로 추정되는 기둥자리 여러 곳이 발견되 었다. 특히 마을의 북쪽의 전월산 등의 산지에서 미호천 방향으로 비교적 완만 한 구릉지가 형성되는데 이쪽에서 고대 생업과 관련된 유적이 나올 확률이 높 을 것으로 보여진다. 자체적으로 이곳 한 지점을 채택하여 지표조사를 해 본 결과 토기류 6 점과 토기의 손잡이 한 기를 발견하였다.
Ⅳ. 가설검증
가설 1)
산과 강에 면한 마을이기 때문에
이 마을엔 농업 외에도 어업이나
마을에 특화된 작물재배가 있을
것이다. ( (X)로 판정)
가설 2)
지도에 제방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
아, 과거에는 마을에 홍수피해가
많았을 것이다. ( (O)로 판정)
가설 3)
마을 가까이에 있는 고인돌은 이 마
을의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추
측하게 한다. ( (O)로 판정)
가설 4)
강으로 둘러싸인 환경 때문에, 고
대로부터 수상교통에서 중요한 역
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 (O)로 판정)
가설 5)
월산리에서 도로로 연결되어 있는
마을은 양화리 밖에 없으므로 월산
리와 양화리는 밀접한 관계가 있
을 것이다. ( (O)로 판정)
검증 1)
주로 생업 활동은 자급자족형( 자체
소비) 의 논농사(1위), 고추, 깨, 콩
(2위) 등의 재배를 주로 한다.(과거
금강나루를 교통로로 이용했을 때
는 잉어낚시 등도 주요 수입원이었
다.) 그러나 특화된 작물재배의 개
념이 아니라, 수지타산이 거의 없는
자급자족형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검증 2)
과거에는 홍수피해가 많았으며, 홍
수에 떠내려 오는 나무를 팔아서
쓰기도 하였다. 작년(2003)년부터
시작해서 현재 진행 중이다. 이전까지
홍수피해가 심하여 큰 비가 오면 마을
의 논과 마을 일부의 고지대만 빼면 다
물에 잠겼다. 대청댐 건설 이후 홍수피
해가 덜하다.
검증 3)
마을 근처 발굴장에서는 현재 충남대
학교에서 발굴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
는데, 현재까지 삼국 시대 이후의 저장
구덩이 형태의 유적만 발굴되고 있다
고 한다. 특히 마을의 북쪽의 전월산
등의 산지에서 미호천 방향으로 비교
적 완만한 구릉지가 형성되는데 이 부
근에서 고대 생업과 관련된 유적이 나
올 확률이 높을 것으로 보여진다.
검증 4)
백제시대에는 수로가 주 교통수단
이었고, 따라서 나루터가 가까운
월산리가 발달하였다. 월산리의 '개골
(介골)'은 깊은 골짜기의 모양인데 육
로가 발달하면서부터 폐쇄적인 형태
가 되어 버렸지만, 이곳은 삼국시대
부터 교역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검증 5)
이 마을은 임씨들이 양화리에서 건너
와서 생긴 전형적인 집성촌이다. 그것
은 양화리를 거쳐서 밖으로 나가고 들어
오도록 교통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월산리의 서쪽에 위치한 양화리와
주로 왕래한다.
Ⅴ. 결어
■이 마을은 지리적으로 금강과 미호천이 합류하는 곳에 입지하여 교역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내륙수운교통의 쇠락으로 마을은 오히려 고립된 곳이 되어버렸다.
■ 마을을 둘러싼 하천은 홍수의 원인이 되었지만 댐과 제방의 건설로 현재는 원활한 농업용수
공급의 이점으로 변화하였다.
■같은 월산리 에서도 1리와 2리는 전월산으로 막혀있어 접촉이 적고, 양화리와 월산 2리가 깊
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현재 마을의 이장은 주변 양화리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라 실제적으로는 마을 연장자들의 발언권이
가장 강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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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12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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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5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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