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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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교개혁 칼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터가 1518년 10월 12일 아우구스부르크 푸거 가문에 나타났을 때, 카예탄은 그에게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자신의 오류를 취소할 것, 둘째는, 그것을 더는 퍼뜨리지 않을 것 그리고 셋째는, 교회의 평화에 해가 되는 모든 활동을 그만둘 것 등이다.
1519년 칼 5세의 독일 황제 선출은 루터에 대한 소송을 일시 멈추게 했다. 1519년 1월 루터와 밀티츠의 협의가 성사되어 양측이 아래와 같이 약속했다. 첫째로, 면죄부 문제에 관하여 차후에 설교나 토론을 하지 않으며, 둘째로, 취소해야 할 루터의 잘못된 주장을 판결해 줄 감독을 한 사람 세우도록 밀티츠를 통해 교황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루터와 에크는 우선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리고 나서 "면죄부", "참회", "연옥" 문제를 다루었다. 1519년 8월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전재한 자신의 논제에 대해 세 개의 글로 그 정당성을 입증했다. 첫 번째는 <교황의 권한에 대한 13개조 논제 해설> 증보판이었고, 두 번째 글은 <해설 혹은 라이프치히 논제 해설>이며, 세 번째는 <요한네스 에크의 사악한 판결 반박>이라는 제목으로 날카로운 논박서이다.
1520년 10월 23일 아켄에서 거행된 황제 즉위식에서 칼 5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제에게 루터를 공개적으로 심문하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1521년 4월 18일 재판은 계속되었고, 사람에게 성서로 그를 반박해 줄 것을 요구했다. 1521년 4월 24일 트리어 대주교 숙소에서 루터에 대한 특별재판이 한번 더 벌어졌고, 비텐베르크로 귀환도중 루터는 도중에 사로잡혔고, 기사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튀링겐의 바르트부르크에서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3월 3일까지 숨어 지냈다. 황제는 1521년 5월 26일 칙령에 서명했다. 칙령은 소위 루터의 잘못된 가르침을 열거했고, 무엇보다도 그가 콘스탄츠 공의회에 손상을 입혔으며, 불안을 야기시켰다고 비난했다.
3) 1520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저서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 후 루터는 독일민족의 대변자가 되었다. 인쇄술은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확산시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 <로마의 교황청에 대하여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로마주의자 반박>을 작성하며 알베르트를 반박하는 글에서 루터는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1520년 처음으로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다. 1520년 여름 그의 글<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기독교 개선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독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이 글은 세 개의 주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로마주의자들의 세 개의 벽과 그들의 개혁. 2. 로마 교황청 개혁의 과제. 3. 기독교인을 통한 개혁의 수행(27가지 개혁요점)
로마 교황청이 쌓은 첫 번째 장벽은 로마 교황청이 성직자 통치, 즉 영적인 권력이 세속적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장벽은 교황의 교리 수위권, 즉 교황만이 성서를 구속력있게 해석할 수 있다는 권한에 대한 것이다. 세 번째 장벽은 결국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황의 요구에 대한 것이다. 1520년 10월 쓴 루터의 세 번째 종교개혁 저서인<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는 교회라는 주제를 다룬 것이다. 성례전에 대해서는 신앙이 의롭게 하는 것이다. 성례전에서 첫째는, 성례 혹은 표지며, 둘째는, 그 성례전(혹은 표지)의 의미고, 마지막 섯째는, 두 가지 방식의 성례전에 대한 신앙이다.
성만찬과 관련하여 잔 박탈의 속박, 화체설의 속박 그리고 공로와 희생인 미사의 의미다. 즉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의 제공을 요구한다. 화체설은 미사에서 사제가 조용히 언급한 재정의 말씀을 통해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세례에 관한 한 루터에 따르면 그 본질이 참회의 성례전을 통해 상대화되었다. 그러나 비록 죄가 은총의 능력을 벗어나 우리를 지배하는 세력이 된다고 할지라도, 죄는 결코 세례의 본질을 소멸시킬 수 없다. 루터는 세례의 성례전으로 묶어서 참회를 세례의 언약을 회복하려는 항구적인 회귀라고 이해하고 있다.
루터에 따르면 자신의 자유를 오르지 신앙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행위들이 더는 그의 칭의나 자유의 성취근거가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만이 궁극적이고 실제적으로 자유하다. 루터는 자유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시작되는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신앙을 통해 우리 안에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인 그리스도의 복은 영혼의 것이 되고 영혼의 부족함과 죄들은 그것을 삼키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연합은 신비적이며 직접적인 존재의 일치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신앙에만 단지 중재되는 일치다.
4) 1521/1522년 루터의 바르트부르크 체류와 비텐베르크 소요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3일까지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머물렀다. 그는 시편 68편, 21편, 22편 그리고 37편을 주해했다. 보름스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시작했던 마리아 찬가주해도 완성했다. 문제의 핵심은 은총을 받은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죄의 문제였다. 1521년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쓴 두 번째로 방대한 저서는 <수도사 서원론>이다. 여기서 그는 수도사이던 자신의 과거를 결산하고 "가난, 순결 그리고 복종"이라는 수도사 서원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라고 말한다.
1524년 10월 4일에야 비로소 그는 수도복을 벗었다. 비텐베르크의 개혁은 가속화하기 시작했고, 게다가 소위 츠비카우의 예언자들, 즉 직조 상인인 니콜라우스 스토르크와 토마스 드레히젤, 한때 멜란히톤의 제자이던 마쿠스 스튀프너 때문에 더 가열되었다. 1523년 예배지침서인 <미사와 성찬 요강>에서 루터는 미사의 희생을 암시하는 모든 것을 제거한 아직은 라틴어로 쓴 미사를 제시했다. 1521년 12월 11주간에 걸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중요한 전제조건은 독일의 다양한 방언이 하나의 통일된 성서언어로 함께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신약과 구약을 망라한 독일어 역 신구약 합본은 1534년에야 이루어졌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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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10.24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7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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